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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 공화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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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윤창희
경제부문 기자

세월이 흘렀어도 유독 기억에 남는 대화가 있다. 인상 깊었거나 공감 가는 얘기일 경우다. 2007년 신제윤 재경부 국제금융심의관과 나눈 대화 한 토막도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유머와 비유를 적절히 섞는 그의 직설화법은 재미가 있다. 사석에서 몇 번 들은 그의 열변은 “선배들 이제 그만들 좀 하시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장관 교체를 계기로 연쇄 사퇴한 간부들이 하나 둘씩 금융공기업의 장 자리를 찾아가던 때로 기억한다. 그는 일본 대장성을 예로 들었다. “이러다 일본 꼴 난다. 대장성도 다 해먹다가 비판적 여론 때문에 어느 단계에선가 (낙하산이) 딱 끊겼다. 자제할 때가 됐다”는 요지였다. 정통 모피아(옛 재무부 출신)인 그의 낙하산 비판이 꽤 인상적으로 들렸다.

 진짜 그의 말처럼 원조 격인 일본에선 낙하산 인사가 급감했다. 2009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는 관료 낙하산 근절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규제법까지 통과됐다. 변칙적인 낙하산을 비판하는 기사가 간혹 일본 언론에 나기도 하지만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었다.

 우리는 어떤가. 감히 말하건대 관료 낙하산은 더 심해졌다. 공기업, 유관기관, 각종 협회의 대표, 부대표, 임원, 감사 등 정부 입김이 미치는 주요 포스트는 온통 관료 차지다. 과거 구색 맞추기 차원에서라도 민간인을 발탁하던 몇몇 공기업 수장마저 모조리 관료로 채워지고 있다. 이 정부 조각(組閣) 때 공무원 출신이 유독 많이 등용된 것까지 감안하면 명실상부한 ‘관료 전성시대’다.

 모피아만 있는 게 아니다. 모피아보다 퇴임 후가 더 ‘따뜻하다’는 산(産)피아(산업통상자원부), 대학총장과 교육 관련 공제회, 연기금 자리를 독식 중인 교(敎)피아(교육부), 금감원의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금융회사 감사를 접수 중인 감(監)피아(감사원), 알짜배기 협회 30개를 거느린 국(國)피아(국토교통부)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관료 낙하산을 너무 당연시하고 있다. 관(官) 프리미엄 때문일까. 어렵다는 고시 합격했고, 고속성장을 이끈 관료 출신이니 민간 전문가보다 한 수 위로 쳐준다. 정치권의 낙하산은 악착같이 비판하는 언론도 관료 앞에서는 날이 무뎌진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공무원들의 집단적 보상의식도 작용한다. 낮은 보수와 높은 업무강도를 생각하면 퇴임 후 적당한 자리에서 벌충하는 건 형평에 반하지 않는다고 본다. 신분 보장은 기본, 해외근무와 연수, 순환보직에 따른 다소간의 여유, 저금리에 위력이 배가된 공무원연금, 유관기관에서 받는 적당한 접대는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달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 관료, 정말 해볼 만하다. 적은 월급을 방패 삼아 퇴임 후 공기업으로, 협회로, 로펌으로 달려가는 이상한 보상 체계.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런 관행이 지금 이 시간 젊은이들을 노량진 고시학원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건 아닐지. 공무원 출신 아무개가 무슨 기관 간부가 됐다는 기사가 하루에 몇 개씩 신문에 실리는 2013년 한국, 이거 정상 아니다.

윤창희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