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지일관 칠전팔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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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 조사보고에 의하면 금년도 서울대학교 신입생 중의 52%가 재수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불과 수삼년 전에 재수생이 차지하였던 비율에 견주어 보면 배 이상으로 증가된 숫자이다. 재수생이 해마다 증가하여 신입생의 반수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다른 여러 가지 부정적인 부작용을 제쳐놓고라도 우선 돈으로만 따져 보아도 그것은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경제적인 손실을 계산해 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하는 학생 수를 1년 평균으로 줄잡아 2만 명 정도로 보고 그들의 사회진출이 1년 늦어짐으로 해서 오는 손실과 재수기간 중에 필요한 경비를 합하여 10만원 정도만 잡아도 20억원의 손실을 가져오고 있다는 계산이 된다. 이것을 국민학교와 중학교 재수생에게도 적용해 보면 실로 그 손실은 놀랄 만한 것이 된다. 우리나라의 학제는 어느새 1년이 삽입된 6·3·3·1·4제로 변모해 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재수생에 관하여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그들의 재수 연한이다. 1년으로부터 9년까지의 범위를 나타내고 있다. 3, 4년간의 재수는 예사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재수의 현상을 초래하게 된 원인은 한마디로 귀결 짓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극심한 입학 경쟁, 부모의 과도한 기대, 대학졸업을 요구하는 학벌위주의 선발 조건, 특정학교에 대한 집착, 「화이트·칼라」직업에 대한 병적인 동경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학진학이나 이른바 일류학교에 대한 재수생 스스로의 거의 강박적인 집착이 더욱 이 문제를 고질화시키고 있다. 그들의 집착관념에 비하면 재수의 쓰라림이나 연한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의 병적인 집착이다.
그런데 그들의 강박적인 집착을 더욱 부채질 해주고 있는 것이 있다. 「초지일관」 「칠전팔기」등의 격언으로 표현된 선신의 가르침이다. 초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역경이나 몇 번에 걸친 실패도 감수해야 된다는 생각이다. 그 꿋꿋한 정신은 높이 평가될만 하다.
그러나「칠전팔기」의 정신은 심리학적으로 보아 현실적인 적응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한두번의 현실검증으로 설정된 목표의 달성이 불가능할 때에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하다. 초지가 잘못되어 있는가를 검토해 볼 필요도 있다. 또 초지가 관철될 수 있는 확률은 대단히 적다는 것도 이해해야 갈 것이다.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일이 초지를 굽히는 의지박약의 소치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옛 선신의 가르침을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근본정신을 본받을지언정 구체적인 행동지침에 대해서는 현대적인 해석이 요청된다. <정원식(서울사대교수·교육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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