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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김의 외로운 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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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승희
워싱턴총국장

부당한 권력에 맞선 한 개인의 몸부림. 할리우드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소재다. 톰 크루즈가 주연한 ‘미션 임파서블’이나, 맷 데이먼이 연기한 ‘본 시리즈’가 그런 영화다.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개인은 영웅으로 부각된다. 현실세계에선, 그러나 개인이 권력에 맞서기란 너무나 고통스럽다.

 한국계 미국 시민권자로 미국 땅에서 그 고통스러운 싸움을 3년간 이어가는 사람이 있다. 1967년생 스티븐 김(한국명 김진우) 얘기다.

 그는 9세 때 미국으로 이민했다. 아버지는 11살 난 아들에게 “오늘 뉴욕타임스 사설이 뭐냐”고 물어 대답을 못하면 “밥 먹을 자격이 없다”고 야단을 쳤다. 엄격한 교육 덕분에 초등학교 때 월반을 했고, 명문 사립고인 포드램 프렙 스쿨을 거쳐 조지타운대에 입학했다. 하버드대 정치학 석사·예일대 박사로 승승장구한 그를 미국 최대의 국립 핵연구소인 리버모어 연구소가 영입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시절 헨리 키신저가 북한 핵과 관련한 브리핑을 듣고 감탄해 딕 체니 당시 부통령에게 소개할 만큼 그의 능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아메리칸 드림은 여기까지다. 지금 그는 미국 정부와 법정투쟁 중이다. 죄목은 간첩죄. 리버모어 연구소 소속으로 국무부 검증·준수·이행 정보 총괄 선임보좌관으로 일하던 2009년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 뒤 폭스뉴스 기자에게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다. 폭스뉴스 기자가 보도한 ‘기밀’이란 “북한이 추가 핵·미사일 실험을 한다는 사실을 중앙정보국(CIA)이 북한 정보원으로부터 파악했다”는 부분이다. 연방 검찰은 스티븐을 정보 유출자로 지목해 2010년 8월 기소했다. 스티븐은 국무부 공보담당자로부터 기자에게 북한 문제를 설명해 주라는 요청을 받았고, 북한이 추가 핵실험을 한다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며, 다른 나라를 위해 일한 게 없는 내가 왜 간첩이냐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검찰 측은 기소 후에도 기밀이라며 수사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재판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그 사이 비싼 변호사 비용을 대느라 그의 재산은 바닥이 났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주 ‘정부의 무리한 언론 사찰’을 문제 삼으며 스티븐 김 사건을 재조명하는 기사를 실었다. 반면 사건 초반만 해도 목소리를 함께 내주고 성금을 모아줬던 한인들은 3년의 세월 앞에 관심이 시들해졌다. 간첩죄라는 사슬에 묶인 그는 낳아준 조국과 키워준 조국으로부터 동시에 외면받은 채 언제 끝날지 모를 ‘싸움’을 외롭게 이어가고 있다. “제 인생은 여기서 멈췄습니다.”

 무제한의 수단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 앞에서 개인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청와대 대변인이라는 비뚤어진 권력에게서 상처 입은 한국계 미국 시민권자인 인턴 직원을 취재하면서 스티븐 김의 비극이 자꾸 중첩돼 눈에 아른거렸다.

박승희 워싱턴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