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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에겐 80점이 100점, 일·가정 위해 20%는 버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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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대표 엄친딸이다.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세상 사람들의 주목 대상이다. 그렇다 보니 끊임없이 누군가와 비교당한다.
그와 나경원 전 의원 가운데 누가 더 잘났나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인 사람들, 참 많았다. 박근혜정부가 들어선 후엔 “만약 그였다면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이 인사청문회 때 당한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까지 흘러나왔다. 꾸미지 않은 동네 아줌마 얼굴 같은 윤 장관의 외모와 대조를 이루는 그의 세련된 미모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 얘기다. 일·가정 양립정책의 하나로 직장 어린이집 확대 방안을 가다듬고 있는 조 장관을 최근 만났다. 여성문제를 책임지고 있는 장관이기에 앞서 변호사·정치인·공직자로 변신하며 숨가쁘게 살아온 워킹맘으로서 그가 지난 20여 년 동안 직접 겪은 일과 가정 양립 문제를 들어봤다.

조윤선 장관은 인터뷰 내내 “난 참 운이 좋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뜻하지 않게 늘 주변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도 했다. 그를 질시하는 속된 말로, 부모 잘 만나 머리 좋고 예쁜 데다 경제적 여유까지 있기 때문이겠지. 그러나 그의 사회적 성공을 운으로만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아무리 환경이 좋다 해도 ‘만년설’이 녹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일과 가정을 둘 다 꾸린다는 건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여풍이 거센 지금 여성부가 과연 필요하냐는 물음에 조 장관은 “산 아래는 눈이 녹았을지 몰라도 산 정상엔 아직 만년설이 남아 있다”며 “눈이 녹을 때까지 당분간 필요하다”고 답했다.)

 그는 “나는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왔지만 모든 사람에게 운만 바라보라고 해서야 되겠느냐”며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사회안전망을 갖추려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또 공무원 조직 등 공공부문뿐 아니라 기업 등 민간 부문에서까지 육아휴직을 자유롭게 쓰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육아휴직을 하면 마치 일에 야심이 없는 양 낙인 찍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휴직한 사람 일을 다른 사람이 다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육아휴직에서 돌아왔을 때 따뜻한 시선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조 장관은 대안으로 철저한 인사관리를 얘기했다. 어느 기업이든 연 평균 출산여성이 몇 명인지 예상해 그만큼 인력을 더 뽑게 하거나, 일을 그만둔 전직 여성 사우를 단기 대체인력으로 채용하는 방식이다. 그는 고용부와 함께 대체인력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적 안전망을 잘 갖춰도 워킹맘은 어렵다. 하물며 1년에 휴가 일주일을 제외하고는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매일 격무에 시달린 로펌 변호사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조 장관으로선 이미 다 지난 얘기지만 중2병 얘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딸이 둘이다. 중2병은 없었나.

 “웬걸. 뭐든지 불만인 시기 아니냐. 하지만 비교적 수월하게 넘어가긴 했다. 돌이켜보니 내가 직장생활한 도움을 받은 것 같다. 아무래도 내가 늘 집에 늦게 들어오니 부딪칠 시간이 적으니까. 전에는 다들 대식구 아니었나. 무슨 일이든 함께 힘을 모으고 어려운 일은 분산되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빠는 직장 나가고 엄마랑 애들만 집에 남는다. 전업주부는 정말 힘들겠구나 싶다. 우리는 주말마다 친할머니·할아버지를 만나 같이 저녁을 먹었다. 이것도 큰 도움이 됐다.”

-중학교 때는 학원이니 뭐니 해서 애들이 더 바쁘다. 주말마다 온 가족이 식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내가 워낙 정보가 없었다. 학원도 전혀 몰랐다. 또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알았다 해도 들어갈 학원이 없었다. 만약 학원에 가면 일종의 열등반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건 애한테 정신적으로 안 좋을 걸로 판단했다. 독서와 영어 정도만 시켰다. 애들이 항상 ‘엄마가 정보가 없으니 힘들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선행은 왜 시키지 않았나.

 “다들 하도 수학 과목 선행을 시키길래 내가 주위 엄마들한테 물었다. 우리 학교 다닐 때보다 수학이 그렇게 어려워졌느냐고. 그랬더니 오히려 어떤 부분에선 쉬워졌다고 하더라. 나이에 맞게 그 학년 교과서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미리 앞서서 보려면 어렵지 않나. 선행을 한다 해도 80%쯤만 이해하는 거다. 그리고 제 학년이 돌아오면 선행했던 걸 다 까먹기 때문에 또다시 공부한다. 제 학년 공부하면서 선행도 해야 하니 제 학년도, 이것도 100% 하기 어렵다. 결국 선행을 한다면서 한 번도 100%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내 마음속으로 선행을 왜 해야 하는지 수긍이 안 갔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학원을 몰랐기 때문이고. 학원 알아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냐. 다른 엄마는 애를 도와야겠다고 아침에 생각하면 저녁 때 실행에 옮긴다. 난 ‘영어학원 알아봐야지’ 하고 마음먹으면 금방 한 달이 지난다. 그렇다 보니 애들이 자기 학원을 스스로 알아오더라. 가끔 애 친구 엄마들 만나면 나보고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말한다.”

-두 딸이 각각 음악과 미술을 한다. 아무 정보도 없다면서 좋은 예체능 선생님을 어떻게 구했나.

 “정보 문제는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내가 운이 좋다는 거다. 내가 워낙 노래를 못해 딸은 그저 노래를 좀 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큰딸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는 소프라노한테 레슨을 맡겼다. 그랬더니 ‘조수미보다 더 높이 올라간다’며 전공을 시켜보라는 거다. 마침 딸도 해보고 싶어 했다. 예원중학교에 가고 싶다고 스스로 목표를 정하니 정말 열심히 노력하더라. 예원중학교는 성악 전공이어도 피아노 시험도 본다. 모차르트 소나타를 연주해야 했는데 그때까지 우리 딸은 초급 수준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피아노 가르치던 선생님한테 무작정 전화했다. 작은 이모가 조카 대하듯 열과 성을 다해 애를 가르쳤다. 한 소절씩 끊어서 연습하더니 시험 때는 정말 모차르트처럼 연주했다.”

-그럼 애 키우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그럴 리가. 내가 워낙 집에 늦게 들어가다 보니 집안일 도와주는 아주머니가 꼭 필요했다. 갑자기 아주머니가 바뀔 때면 비상이 걸렸다. 아무리 인터뷰를 하고 뽑아도 문제를 미리 파악하기 어렵다. 열 번도 넘게 바뀌었다. 한 달도 안 돼 서너 차례 바뀌기도 했으니까. 내가 오죽하면 다음 생에 태어나면 곤충으로 태어나도 좋으니 수컷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겠나. 그래서 사회안전망을 만들 때도 단순히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돈 주고 육아 돌보미를 쓰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현실 속에선 소용없는 경우가 많다. 현찰만으로는 안 된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시스템을 갖춘다고 정말 일과 가정이 양립될까. 오히려 아이가 클수록 엄마 손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무슨 일이든 정말 잘하려면 몰입해야 한다. 워킹맘의 문제는 이거다. 애 챙긴다 싶으면 회사 일에 소홀한 것 같고, 회사 일에 몰두하면 애를 방치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결국 둘 다 100% 하려고 하기보다 둘 다 80%쯤 하겠다고 마음먹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내 친정어머니는 무서우신 편이었다. 또 스스로 뭐든지 완벽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지금도 내가 주차를 조금만 비뚤어지게 해도 잘 참지 못하신다. 난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 보니 어릴 때 야단을 많이 맞았다. 답답하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게 싫으니까 내 애는 다르게 키우겠다고 마음먹었다. 자유롭게 키웠다고 생각한다. 친정어머니는 계속 ‘애를 너무 느슨하게 키운다’거나 ‘요새 애들 그냥 크는 거 아니다’라고 걱정하셨다. 그런 말 들을 때마다 굉장히 속상했다. 하지만 일과 양육 둘 다 하려면 한쪽을 20%씩은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많은 워킹맘은 욕 안 먹으려 남자보다 더 기를 쓰고 일하는 게 현실 아닌가.

 “그렇다. 내가 김&장 첫 여성 변호사였다. 엄청난 책임감이 있었다. 만약 내가 뭔가 잘못하면 여긴 앞으로 절대 여자 변호사 안 쓰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정말 기를 쓰고 일했다. 애 엄마 티 안 내려고 알게 모르게 많이 노력했다. 또 일 잘할 것 같은 여자 사법연수생들 만나 설득시켜 로펌에 데려왔다. 지금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절반 이상이 여자 변호사지만.”

-부부가 다 변호사다. 애들이 변호사가 되고 싶어 하지 않나.

 “전혀. 로펌 시절 밤새워 일하는 게 다반사였다. 남편을 포함해 남자 변호사들은 회의실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지만 난 밤 12시 넘으면 집에서 주로 했다. 소송 기록을 분홍색 보자기에 싸서 집에 갖고 왔는데, 세워 놓으면 2m높이에 달할 만큼 방대했다. 이 기록을 검토하고 쓰면서 밤새우는 게 다반사였다. 이걸 만날 보니까 애들이 질린 모양이다. 변호사 한다는 소리는 안 한다.”

-그럼 무슨 직업을 갖기를 원하나.

 “얼마 전 큰딸이 ‘엄마 세대는 어떤 직업을 가지려면 그거에 맞게 준비하고 시험을 쳤겠지만 우리 세대는 다르다’고 말하더라. 직업이 먼저 있고 거기에 맞추는 게 아니라 내가 새로운 직업을 만든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 적응하고 살아갈 수 없다고. 맞는 말이다. 남편도 한때 ‘직업 안정성 등을 고려할 때 애들이 변호사가 됐으면 좋겠다’고 하더니 요즘은 ‘그런 시대는 간 것 같다’고 생각을 바꿨다. 창의력이 있고, 그걸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거다.”

-큰딸이 서울대에 가지 않았다. 서울대 출신으로 서운하진 않았나.

 “내가 너무 바쁘게 일하다 보니 다른 엄마처럼 잘 돌봐주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은 있다. 하지만 나도 남편도 학벌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대학 졸업 후 30대까지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여성 후배에게 조언할 기회가 많을 것 같다. 어떤 얘기를 주로 하나.

 “그 바쁜 와중에 어떻게 자식을 키웠는지 궁금해해서 솔직하게 말해주면 ‘공감을 못하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남들은 대출금 갚기에 바빠 외식 한번 하기도 어려운데 도우미 아주머니 쓰면서 뭐가 어려우냐는 거다. 그런 시각 때문에 늘 조심스럽다.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와 다닐 때도 그런 얘기 하는 걸 정말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난 내 나름대로 애 키우면서 절박하고 어려웠다. 워킹맘은 누구나 그런 순간을 겪는다. 그래서 일·가정 양립과 관련한 사회안전망이 필요하다고 늘 생각했다. 2008년 국회의원이 된 후 맨 처음 하고자 했던 일이기도 하다. 여성부는 기재부나 복지부에 비해 힘 없는 부처지만 하고 싶은 일을 추진할 수 있어 기쁘다. 우리 부처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만 큰 그림에서 방향을 잡고 다른 부처가 따라올 수 있게 조율하려고 한다.”

조윤선(47세)
1966년 서울
상명중·세화여고·서울대 외교학과·
컬럼비아대 로스쿨 법학 석사
1991년 33회 사법고시 합격
1992년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지적재산권)
2002년 16대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선대위공동 대변인
2007년 한국씨티은행 부행장 겸 법무본부장
2008년 18대 국회의원(비례대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변인
2012년 18대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선대위 공동 대변인, 대통령 인수위 대변인
현 여성가족부 장관
 

가족: 남편 김&장 박성엽 변호사(52·공정거래)와 2녀
사는 곳: 서초구 신반포
근무하는 곳: 중구 청계천로 여성가족부
장 보는 곳: 서초구 잠원동 킴스클럽
자주 가는 식당: 구반포 반포치킨, 청계천 한정식집 한미리, 삼청동 중식당 청
 
자녀
장녀(19): 예원중-예고-이화여대 성악과
차녀(15): 계성초-예원중(미술 전공) - 유학중

글=안혜리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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