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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항일투쟁의 결정적사료| 「의병일기」발견|의병대장 해운당 김하락 「단발령후 7개월」기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구한말에 가장 큰 규모로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던 의병대장 김하락씨의 의병일기가 극적으로 발견됐다. 이는 우리나라독립운동사의 첫「폐이지」를 장식할 귀중한사료, 이제까지 시기·장소·전투사항등 아리송하던 역사가 소상히 밝혀지게 된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8일 이를숨겨 간수해온이대길여사(80·서울성북구월계동142)를 찾아 일기책을인수받는한편 그의입수경위를들었다.
일기책은 해운당 김공정 왜 일기. 품에지니고다닐수있는11×7센티의조그만책자50장으로 한지를노끈으로매어 한문글씨를깨알같이써놓았다. 그밖에2통의 한글편지는 김의병대장이 전사한후시체와일기를수습한데대한기록.
이일기의 막중한 가치를 굳게 뒷받침하는 문서이다.
이 여사는 김하락대장의 외동딸 김영규여사가 60여년전북제주로망명하며맡기고간 것이라고 하면서 『여기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화를당할까 두려워 그동안 남모르게 간직했다, 본인이 오면 주려했는데….』 이제고령이라더가지고 있을수없기때문에정부에 바치기로했다면서 이여사는 『자식들에게 맡기면혹시라도 분실할까싶어』직접전하는것이라고끔찍이 여기는심정을토로했다.

<11×7센티 50장 깨알같은 한자로>
갑오개화이후 국운이 위급함을 좌시할 수 없었던 전국각지의 유생과마찬가지로 맨처음 구국운동의 횃불을 쳐든 김하락씨의 일기는 불과6개월20일분.
그의 이름은 여태까지 역사기록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남한산성을 점거하고 서울공략을 꾀하던 무명의 풍운아』가 바로 그임을 일기가 입증하고있다.
김씨(1846∼1896)는 의성인으로 호는 해운당.
고종이 단발령을 내리고 솔선해 머리를 깎던 다음날-1895년11월16일 집(서울)을 떠나며 발자취를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승패를 거듭하다가 경북 영덕서 마지막 장렬하게 목숨을 끊던 이틀전-96년6월2일『…드디어 군을 재촉해 행진하다』로 절필이다.
의병이 6월4일 영덕강구항에 다다랐을때 폭우를 틈타 관군이 기습해와 의병은 거의 전몰
하고 그도 중상을 입자 오십천에 뛰어들어 자결했다는 것은「참관부노지전설」.

<외딸은 만주망명 이대길여사 보관>
가까스로 시체를수습, 신원을 밝혀낸 마을사람 한규열씨는 뒷날 그의따님에게 보낸 2통의 한글편지를 남겼다.
해운당이 집을 떠날때 자병(아들·5세) 영규(딸·10세)남매가 있었다. 10년뒤 딸영규는 남장을 하고 아버지를 찾아 헤맨끝에 영덕에 이르러한씨를 만나고 그의 도움으로 부친을 서천으로이장한뒤 망명길에 오르기에 앞서 지금까지 이책을 간수해온 전의의 이대길여사와 우연히 알게돼 잠시 의탁, 은신했다. 일기책은 이때 필사정리한것. 그래서 일기에잇대어 뒷사람들의 추도문이 부록으로 곁들여있다.

<을미년 수수께끼「남한산성22일」>
해운당의 의병일기에는 나라를 근심하는 충정만이 아니라 각지방 의병의 규모와 전투·인적상황등이 상세하여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당시 중요지방은 경기 강원 충북과영남. 『을미의병의 많은수수께끼가 풀리게됐다』고국사편찬위 최영희편사실장은 기쁨을 감추지못한다.
을미 의병중 남한산성에 웅거했던 의병이 하룻밤에 패산한 까닭은무엇일까. 벙력2천이요 성중에있던 대포구·불낭기·천황지자포가 각기 수10, 천보총 수백에 조총은 부지기수이며 또한산파같이쌓인 화약을 관군으로부터 노획해 22일간이나 기세등등 하던 의병이 삽시간에 무너진연유는 수수께끼 처럼 돼있었다.

<유수직탐낸 부하 성열어 일군 맞아>
해운당은 당초 조성학구연영 김태원 신용희등과 함께 서울을 떠나이천서 의병을조직, 부대를 편성했다. 1896년1월30일 남한산성을 점령했을때 그는 도지휘(총사령관). 그런데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박준영과 좌익장 김귀성이 관군과결탁, 4대문의 군졸을만취시켜놓고 밤에 문을 열어 적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박은 광주유수, 김은 수원유수를 주겠다는 꾐에 수많은 동지를 배반했다고 해운당은 격분한 글을 적어놨다.
『우리가 성문을 급히나서매 관군(일군에 끌려온)조차 민족의 양심이없어지지 않아 속히 달아나라 호송하거늘 대장에까지 추대된 박·김 두 놈은 온 민족에대한 극악대죄가 되는 짓임에도불구하고 사리를취해 스스로 절멸의 길을 택했다.』

<한때경주를점거 흉몽서 최후예견>
해운당은 즉시 남은 의병을 이끌고 제천서 부대를 재편성, 단양을 거쳐 안동의 성서 의병을 규합하고 청송에서접전. 5월7일 경주까지 점거했으나 다시 후퇴. 그는 동해안을 거슬러 오르며 승전고를울려행진 했다.
일제의 손아귀 속에서 정부가 아주 무력해졌을때 오직 민족의 독립과 나라를 바로잡으려던 풍운의 애국자는 마지막일기를 다음과 같이 끝맺고있다.

<성상위로못해 한 새벽행군…절필>
『6월2일-새벽에 조성학이 막사로 들어오다가 내가 간밤의 꿈얘기(대장기가 떨어진)를 했더니 조장군은 흉몽이므로 행진을 멈추자고했다. 그러나 의병을 1년이나일으켜 생민에게 고충만 끼치고 성상의 근심을 위로치 못했으며 한칼로왜적의 배를 가르지 못해 항상 한스러운데 어찌무실한 꿈 때문에 적을두고 물러서겠는가. 하물며 사생은 천명이거늘 더한이 있으랴. 드디어 군을 재촉해 행진하다.』
◇해운당의 독자 김자병(78세·충남서천?)씨는 의성김씨종친회(서울 장위동 246의240)김창목씨에게 연락바람. <이종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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