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승부수, 5만 SW대군 직접 키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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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2011년 7월 29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수원사업장에서 열린 ‘선진제품 비교 전시회’를 두 시간에 걸쳐 유심히 돌아봤다. 관람을 마친 이 회장은 사장단에 이렇게 지시했다. “5년 후, 10년 후를 위해 지금 당장 소프트기술 경쟁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악착같이 소프트기술을 확보하라.” 이 회장은 이어 “기술 확보를 위해서는 S(수퍼)급 인재를 뽑는 데서 그치지 말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특히 소프트웨어 인력은 열과 성을 다해 뽑고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건희(71) 삼성전자 회장이 소프트웨어(SW) 인재 확보를 위해 새로운 작전 지도를 펼쳤다.

 이전의 SW인재 확보 전략이 국내외에서 ‘준비된’ SW 전문가들을 영입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엔 관련 인력을 체계적으로 육성해 배출하는 ‘SW 대군(大軍)’ 양성 쪽으로 방향을 확 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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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생부터 전산 전공자까지 5만 대군

삼성그룹은 올해부터 5년간 1675억원을 투입해 SW 인력 5만 명을 양성한다고 15일 밝혔다. 필요한 SW 인재를 직접 길러서 쓰겠다는 것이다.

 삼성그룹은 이를 위해 크게 4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우선 SW 전공자를 대상으로 ‘SW 전문가 과정’을 도입한다. 여기에는 5년간 모두 625억원이 투입된다. 25개 대학 전산 관련 전공자 가운데 2500명을 선발해 이들에게 3~4학년 2년간 등록금 전액을 지원한다. 교육을 마친 학생들이 삼성에 입사를 지원할 경우엔 우대할 계획이다. 각 대학에는 SW 전문가 과정 개설과 교과목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한다. 이인용 삼성 커뮤니케이션팀장(사장)은 “기업 현장에서 요구되는 SW 전문인력을 학생 때부터 집중 교육을 통해 맞춤형으로 길러 사회 전반의 SW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SW 전공자는 아니지만 이 분야에 관심이 많거나 소질이 있는 학생들을 위해서는 ‘비전공자 양성과정’을 신설한다. 5년간 500억원을 투자해 SW 인력 5000명을 양성할 계획이다. 비전공자들이 2~4학년 3년간 매 학기 2과목씩 총 12과목, 36학점의 SW 과목을 이수할 수 있도록 하고, 방학 중에는 4주간 별도의 SW 교육과 현장 인턴 실습 기회도 부여한다. 20개 대학에는 과정 개설과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한다. 삼성 관계자는 “다양한 전공을 가진 학생들이 SW 분야에 뛰어들어 융복합형 아이디어로 SW 경쟁력을 높여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SW 인력양성 프로그램으로 이미 운영 중이던 ‘삼성 SW 멤버십’과 ‘에스젠클럽(sGen-club)’은 확대된다. 5년간 500억원을 투자해 총 2500명의 SW 인력을 양성한다. 현재 매년 250명 선발하던 규모를 500명으로 2배 늘리는 것이다. ‘삼성 S/W 멤버십’은 삼성전자가 1991년 설립한 대학생 멤버십 제도로 전공과 상관없이 SW에 관심 있는 대학생들이 모여 자유롭게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연구공간과 첨단장비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현재 서울 3개, 지방 6개 등 전국 9개 지역에서 운영 중이다. 삼성은 여기에 매년 85억원(5년간 425억원)을 투자해 5년간 2000명의 SW 인력을 양성하기로 했다. 삼성SDS가 2011년 설립한 에스젠클럽은 나이나 전공과 무관하게 끼와 열정을 겸비한 인재들이 모여 자유주제 프로젝트를 통해 SW 역량을 키워가는 양성 프로그램이다. 삼성은 이 프로그램에 매년 15억원씩 5년간 75억원을 투자해 총 500명의 SW 인력을 양성할 계획이다.

 미래 인재들을 배출하기 위한 ‘SW인재’의 싹도 틔울 예정이다.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주니어 SW 아카데미’ 설립이다. 삼성은 5년간 50억원을 투입해 초·중·고생 4만 명에게 SW를 기초부터 가르칠 계획이다. 교육은 평일과 주말의 방과후 수업, SW 동아리 대상 특강의 형태로 진행된다.

 ‘양성’ 외에 ‘선발’도 확대한다. 삼성은 올해부터 5년간 SW 인력 1만 명 이상을 채용할 방침이다. 지금까지 매년 약 1500명의 SW 인력을 채용해 왔으나, 올해부터는 연 2000명 이상으로 채용을 늘릴 계획이다. 인문계 전공자를 ‘잡스형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올해 처음 도입한 ‘삼성 컨버전스 SW 아카데미’도 선발을 늘린다. 삼성 관계자는 “당초 연 200명 규모로 운영할 계획이었지만, 우수한 지원자들이 많이 지원하고 사회적 기대도 커 400명 이상으로 확대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화려한 HW에 가려진 초라한 SW

삼성이 SW 인력 육성과 확보에 나선 것은 SW가 정보기술(IT) 산업의 핵심 경쟁력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삼성은 그동안 하드웨어(HW) 제조에 있어서는 세계 최강자의 반열에 올랐지만 이를 작동시키고 삶에 혁신을 가져다줄 SW 개발에서는 아직 글로벌 초일류 기업과의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마트폰인 갤럭시 시리즈를 만드는 회사가 됐지만 운영체제(OS)는 구글의 안드로이드를 쓰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실제 삼성은 2009년 11월 자체 제작한 OS ‘바다’를 처음 공개한 바 있다. 바다는 화려한 영상으로 시선을 끌었으나 아이폰에 있는 오카리나 연주 흉내 내기, 거리측정 기능 등이 없었다. 한 IT 전문가는 이를 “화려한 하드웨어에 가려진 삼성의 초라한 소프트웨어 속살이 드러난 사건”이라며 “SW는 HW 생산 공장의 미덕인 ‘근면’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창조적 파괴가 필요하기 때문에 창의력 넘치는 인재 확보가 필수”라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이 2011년 8월 구글이 모토로라를 인수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IT 파워가 삼성 같은 하드웨어 업체에서 소프트웨어 강자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 것도 이 같은 고민을 반영한다.

 현재 국내 산업계는 SW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지난달 공개한 ‘SW 직업인력 고용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SW 개발 전문가의 미충원율이 28.9%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 문을 나서는 SW 인력의 수가 기업들이 필요한 수치의 70% 정도에 불과한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SW 산업의 고용유발 효과는 제조업의 2배”라며 “인재들이 SW 분야에 뛰어들면 대한민국 IT 경쟁력이 높아지고 청년실업문제 해소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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