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소일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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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막상 기나긴 방학이 종반으로 접어드니 막막하다. 더구나 수은주의 붉은 선이 아래로만 내려가는 추위 속에서라 더욱 더 할 일이 캄캄하였다.
아랫목을 점령하여 꿈같은 미래의 확트인 행운을 공상도 해보고 예정했던 책을 읽기도 진력이 나기 시작한다. 부모님 보기에도 송구스럽지만 여동생이 대학입시공부를 한다고 안절부절을 못할때는 몹시 난처하다.
이럴 바에야 평소부터 좋아하는 바둑을 두자고 부시시 일어섰다. 10시에 기원문을 두드렸다. 어느덧 밖이 어두웠고 잠시 후 기원 문을 닫는다고 소녀가 일러준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 동안 점심, 저녁을 굶고 바둑을 두었을 것인데 배가 약간 이상할 뿐 아무렇지도 않았다. 더구나 지금까지의 시간이 몇 분에 불과한 느낌이다. 오히려 아쉬울 뿐….
집에 와서도 흑백의 불 뿜는 대결이 뚜렷하게 부각되어 온다. 이긴 것 같은데 잠시 후 포로가 되고 단신으로 적진에 돌진하여 모조리 물리치기도 하는…. 그것은 마치 치열한 전쟁보다 생활전선을 연상시켜 서글픔으로 느껴온다. 시간가는 줄 모르는 신선놀음이라는 바둑에서까지 급박한 생활을 결부시키게 된다는 것이 더욱 입맛을 쓰게 한다. <이현우·학생·서울 흑석2동 23의3호8통6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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