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를 닮은 창 많은 집, 앞뒤 풍경이 실내로 우르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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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남출판사 조상호 사장이 15개월 된 외손자를 데리고 뒤뜰을 걷고 있다.
집은 뒤뜰에서 보면 지하층이 드러나 2층집 같지만, 앞에서 보면 나즈막한 단층이다.

남의 집을 구경하는 데 오랫동안 재미 들여 살아 왔다. 건축법을 배우자는 것도 아니고 인테리어를 흉내 내려는 것도 아니었다. 공간 안에 녹아 있는 주인의 삶의 방식, 그걸 읽는 재미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집은 희한하게도 주인의 역사와 현재 모습을 압축해 보여주고, 그 집 식구들이 무엇을 추구하고 살아가는지를 확연히 냄새 맡게 한다.

그러고 보니 나남출판사 조상호(63) 사장을 만난 것은 10년이 썩 넘었다. 아직 박경리 선생이 살아계시던 시절, 경남 하동 악양 평사리에서 첫 토지문화제를 개최하던 무렵 나는 친구들을 10명이나 끌고 나남의 전세버스에 올라 악양에 내려간 적이 있다. 그는 마을 앞에 선 느티나무나 회화나무 같은 풍모로 간결하고 뭉툭하게 말하며 사람들을 웃겼고, 선비 같기도 투사 같기도 한 얼굴로 당시 이미 2000권이 넘는 나남의 도서 목록을 슬그머니 자랑했었다.

옆에서 본 집의 외관. 동그란 지붕을 이고 있는 부분은 손님방으로 딸 내외가 자주 묵고 간다.

뜰엔 온통 나무 … 수목원에 들어 앉은 듯

그가 나무를 키운다는 얘기는 진작에 듣고 있었다. 나남이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로 이사 가기 전 서울 양재동 지훈빌딩 5층 사장실 문 밖으로 대숲이 우거진 걸 본 적 있고, 도심의 이면도로에 어울리지 않게도 장하게 자라난 소나무들을 올려다본 기억도 있다. 그런데 10년 후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광릉 끝자락 그의 집에서 양재동 시절의 나무들을 확인한 것은 자그만 감격이었다.

“21년째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소나무예요. 지훈빌딩 앞에 자라는 걸 버릴 수 없어 캐 가지고 왔어요.”

조상호 사장을 말하려면 나무 이야기부터 꺼내는 게 마땅하다. 그는 어느새 나무 속에 묻힌 사람이 됐다. 나무를 베어내 책을 만드는 원죄를 가진 직업이 출판이니 그걸 속죄하기 위해서냐고 누가 물을라치면 그렇게 거창한 이유를 갖다 붙이지 말라고 손을 내젓지만 어찌됐건 책과 나무는 그의 삶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집 구경도 건물이 아니라 나무 구경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서겠다.

일단 뜰이 온통 나무다. 아니 뜰이라 불리는 곳은 개념상 집에 딸린 공간이니 조 사장의 집은 뜰이 아니라 그냥 수목원 속에 집이 들어앉았다고 하는 편이 옳다. 현관에 들어서기 전에 상견례 하듯 나무부터 주루룩 소개한다.

“이건 아들 지훈을 위해서 심은 금강송입니다. 12년 전에 35년 된 놈을 사왔으니 나이가 나오지요. 저쪽 건 딸 완희를 위해 심은 것이지요. 그건 오라비 나무보다 나이가 조금 적어요. 이 매실나무는 15년 전에 25년 된 놈을 사서 심었어요. 처음에는 늘 푸른 소나무가 좋더니 요새는 봄이 되면 이파리가 몸부림치며 올라오는 활엽수가 더 좋아졌어요. 이건 주목이고 이건 대왕참나무고 이건 단풍, 이건 앵두, 이건 은행, 이건 감나무, 대추나무….”

천지에 가득 봄이 오고 있었다. 물오르는 나뭇가지들의 설렘과 안간힘이 눈앞에 가득한 날이었다. 내가 내촌에 간 날은 이른바 ‘여우가 시집가는 날’이었다. 햇볕이 쏟아지다가 금방 비가 오다가 다시 햇살이 번쩍거리며 솟아나곤 했다. 4월이고 분명 꽃이 피었건만 비는 순식간에 자욱한 눈보라로 변하기도 했다. 그걸 우리는 창이 많은 실내에서 내다봤다. 실내엔 장작불이 우렁차게 차오르는 무쇠 난로가 놓여 있고 바깥엔 난만한 봄기운 위로 송이가 굵은 눈발이 매화인 양 흩날렸다.

“보세요. 저기 흰 자작나무 끝 가지들이 모두 빨갛지 않습니까. 단풍나무도 빨갛게 충혈된 게 보이지요? 물이 오르느라고 저렇습니다. 사람들은 버드나무만 보고 나무에 물이 오르는 걸 파란 색깔로만 아는데 저렇게 빨갛게 물이 오르는 나무들이 더 종류가 많을걸요.”

나무에 물 오르는 양을 해마다 곰곰이 지켜볼 수 있는 삶이 멋진 삶인 것은 확실하다. 조 사장은 아직 현역으로 나남에서 출판되는 원고를 스스로 몽땅 읽고 있지만 복작거리는 서울이 아닌 파주와 내촌을 오가면서 자연의 에너지를 듬뿍 받아 동시대 평균인보다 기운생동하는 것 같다.

앞뒤로 창이 많은 거실, 벽난로에 지필 장작은 뜰에서 전지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밖과 바로 통하는 초가집이 건축 모티브

집은 초가를 짓고 싶었다. 지붕을 짚으로 이는 것이 아니라 초가 같은 모티브를 원했다. 나지막하게 엎드린 꼴, 방 앞에 긴 툇마루를 두는 편리와 정다움, 문을 열면 바깥과 바로 통하는 홑집의 자유! 그게 조 사장이 집에 구현하고 싶은 가치였다.

땅은 오래전에 마련해뒀다.

“25년 전 언론학자 오택섭 선생 시골집에 놀러 갔다가 그 옆에 1653㎡(500평) 천수답을 우연히 구입하게 됐어요. 잇닿은 국유림 2645㎡(800평)은 임대를 받았고요. 밭 뒤에 포도밭 4298㎡(1300평)이 있었는데 소 키우는 사람들이 사들여 축사를 짓는다는 걸 막으려고 동네 사람들이 궁리를 짜내는데 명색이 사장이라고 날더러 그 땅을 사라고 해서…. 그러는 바람에 땅이 8595㎡(2600평)으로 커져 버렸어요.”

그 땅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나무는 나날이 자랐고 나무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열렸고 점차 낙원 비스름하게 가꿔져 갔다.

집터 곁에는 마르지 않는 개울이 흘렀다. 15년 전 개울 곁에 축대를 쌓고 231㎡(70평) 남짓한 집을 지었다. 사람 좋아하는 그의 집에 자연히 친구들이 몰려올 수밖에! 친구들이 한 집 두 집 들어오기 시작했고, 지금 골짝 안에 조 사장의 친구들만 예닐곱 집 모여 살게 됐다.

지하공간으로 내려가는 계단. 이 계단을 통과하면 여름거실로 쓰는 드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비밀스러움 간직하려 지하공간도 마련

“집은 ‘공시인’건축사사무소의 최부득 형에게 맡겼어요. 전통건축에 대해 궁리가 깊은 건축가인데 그 형에게 세 가지를 요구했어요. 아까 말한 선비가 사는 초가집이 첫째고. 둘째, 창을 충분히 많이 내달라고 했지요. 집 안에서 집 밖을 실컷 내다볼 수 있고 안팎이 서로 들락날락할 수 있게! 셋째로 지하실을 하나 만들길 원했어요. 처형이 원장수녀로 있는데 그분이 머무는 성당에 가 보면 지하에 늘 비밀통로 같은 게 있더라고요. 그 비밀스러움이 맘에 들어 지하공간을 만들었더니 여간 편리한 게 아니에요. 바람이 아주 잘 통하고 습기가 전혀 없고 배선·수도관을 넣을 수 있어서 수리할 때도 좋고!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그 말을 꼭 좀 해줬으면 좋겠더라고!”

그래서 지은 집은 과연 앞뒤 풍경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온다. 스스로 심고 키운 나무들의 사계가 온통 눈앞에서 흔들렸다. 세월 따라 나무의 키가 커지면서 집은 한층 고즈넉해지고 나지막해졌다.

나남출판을 얘기하면서 짧게라도 조지훈 선생을 언급하지 않으면 핵심이 빠져 버린다. 그는 광주고 다닐 때 강연에서 조지훈 선생을 한 번 만났다. 그래서 선생이 재직했던 고려대에 진학했지만 선생은 곧 타계했다. 조 사장은 아들이 태어나자 아들 이름을 지훈으로 짓고, 빌딩을 짓자 빌딩 이름을 지훈으로 짓고, 지훈문학상과 지훈학술상을 제정하고, 지훈 선생이 늘 자신을 지켜보신다고 여기면서 산다.

생전의 박경리 선생은 조 사장에게 “당신을 보면 『토지』의 주갑이가 떠올라. 내가 만들긴 했지만 주갑이가 가장 정 가는 인물이지” 했었다는데, 그 우직하고 지혜로운 현실의 ‘주갑이’가 꾸는 꿈은 한국의 몽파르나스를 만드는 일이다.

결혼 38년 째인 아내 황옥순(왼쪽)씨와 조상호 사장이 텃밭을 매고 있다.

“파리에는 사트르르와 보부아르, 보들레르와 브랑쿠시가 함께 묻힌 묘역이 있잖아요. 국가 유공자를 묻는 국립묘지 말고 우리 정신문화에 큰 족적을 남긴 문화인, 실천적 지식인 등이 함께 묻히는 묘원을 만들고 싶어요. 그곳에 묻히는 것 자체가 명예가 되고, 거기에 묻힐 영예를 유지하기 위해 노년이 되어도 자신의 삶을 개결하게 추스를 수 있는 묘원을!”

그 말을 들은 게 10년 전인데, 그의 꿈은 이미 절반쯤 이뤄진 것 같다. 지금 그는 경기도 포천 신북에 수목원을 만들어 자연의 정령이 살아 있는 우렁찬 산과 계곡과 숲을 가꾸고 있으니 머잖아 뭐가 됐든 모양새가 나오지 않겠는가.

글=김서령 칼럼니스트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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