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증인 136세 WP, 반성 않는 일본 꾸짖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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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이 실린 워싱턴포스트 5월 1일자 14면.

워싱턴포스트(WP)는 1877년생이다. 미국 나이로 올해 136살이다. 나이가 많다 보니 태평양 건너 1910년의 한·일강제병합도 지켜봤고, 1945년의 해방도 지켜봤다.

 그런 워싱턴포스트가 1일자 A14면 오피니언난에 ‘제2차 세계대전의 일본’이란 표제로 아베 총리의 사진과 함께 두 명의 일본 독자를 초대했다. 독자 투고를 한 한 명의 독자는 사사에 겐이치로(佐佐江賢一郞) 주미 일본대사였다. 또 한 명은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 비엔나시에 사는 유키 헨닝저라는 재미 일본인이었다.

 WP는 지난달 27일 사설에서 “같은 제2차 세계대전 전범자이면서 일본은 왜 독일처럼 정직하지 못한가”라고 비판했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신사 참배를 옹호하고 “전쟁을 정의하는 건 정부가 할 일이 아니라 역사가들이 할 일”이라는 등의 발언으로 한국과 중국의 비판을 사던 때였다.

 사사에 대사의 기고문은 그 사설에 대한 일종의 반론이었다. 외교적 용어로 포장됐지만 결국은 일본 정부 입장을 변호하는 내용이었다. 사사에 대사는 “일본 정부는 이미 깊은 후회와 진정한 사과의 뜻을 밝혔고, 제2차 세계대전 희생자들에게도 진심으로 애도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이어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지난주에 이런 뜻을 밝힌 건 아베 총리의 의중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사에 대사의 속내는 그 다음에 나왔다. 그는 “역사를 직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노력은 역사학자나 지식인들의 성과를 통해 이뤄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아베 총리 발언의 복사판이었다.

 사사에 대사는 글 말미에 일본에 대한 자화자찬도 했다. “일본은 역사에서 배운 교훈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론 자유와 민주주의 같은 기본적 가치에 충실한 사회를 건설해 왔다” “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에 공헌하는 한편 한반도의 안정과 북한 비핵화 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등의 대목이 대표적이다. WP가 사설에서 한국과 중국 등의 분노를 언급했던 것에 대해 우회적인 반박도 했다. 그는 “책임 있는 민주국가로서 일본은 한국 등 이웃 나라와 함께 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변국들의 비판을 산 신사 참배나 역사 왜곡 등에 대해선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WP는 사사에 대사의 글에 흥분했을 법도 하지만 냉정했다. 사사에 대사의 글에 이어 “일본에서 태어나 60년대 후반까지 학창시절을 보냈던 여성”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보통 독자’ 유키의 글을 실었다.

 유키는 “(일본에서) 우리는 원자폭탄의 희생자라고만 배웠을 뿐 원폭을 초래한 전쟁의 핵심 가해자라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특히 “이곳(미국)에서 중국인·한국인·필리핀인·대만인·네덜란드인을 만나면서 일본이 전쟁 기간에 저지른 행동을 세계가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불편한 사실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그는 독일의 통렬한 반성과 대조를 이루는 일본의 역사 부정에 종종 놀란다고도 썼다. “일본에 사는 동시대인들이나 일본 언론들은 이런 이슈에 대해 반성하는 걸 꺼리는 것 같다”는 게 그의 직관이다.

 유키의 어조는 단호했다.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미국에 있는 일본인 친구들과 나는 일본이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세계의 여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유키는 “일본에는 ‘튀어나온 못은 망치로 맞는다’는 속담이 있다”며 “그래선지 일본에선 아무도 이런 민감한 이슈를 기꺼이 나서서 얘기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로 글을 맺었다.

 WP는 자신의 신문에 실린 사사에 대사의 글을 비판하지 않았다. 직접 나서지도 않았다. 그저 편집국에 전달된 여러 독자 투고 중에서 다른 일본인이 쓴 글을 사사에 대사의 글과 같은 크기로 나란히 편집해 실었을 뿐이다. 하지만 사사에 대사의 글과 유키의 글은 판이하게 달랐다. 독자들로 하여금 누구의 글이 바른 역사관과 양심을 담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게 했다. 세련된 힘이었다. 46만 부(2012년 9월 기준)의 발행부수를 가진 WP는 뉴욕타임스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꼽힌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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