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애국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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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가을에 오는 비는 계절을 가슴으로 느끼게 해준다. 낙엽 한 잎 밟기 힘든 도시의 포도 위에서 문득 울밀한 산이 옆으로 다가선 듯한 착각에 잠긴다. 비 온 다음날의 하늘과 깨끗한 공기와 한결 선명해 보이는 화점들의 국화와…. 도시에서도 먼 빛으로나마 자연의 숙정을 명상하게 된다. 가을은 어느 계절보다도 국토의 아름다움을 감동 속에서 펴 보인다. 봄의 꽃, 5월의 신록도 좋지만 가을날 타는 듯한 단풍은 하늘빛과 상쾌한 공기에 어울려 한국이라는 우리의 조국에 유난스럽게 애착을 갖게 한다.
낙엽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숲 속을 거닐 때의 고요하게 잠적하는 마음을 생각한다. 깊은 낙엽더미 속에서 촌동들이 혼자 뒹굴며 노는 모습은 어른의 마음도 흔들어준다. 「유럽」이나 미 대륙의 단풍은 황색을 기조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단풍들은 빨간빛만도 불그레한 색깔만도 아니다. 적·홍·황 그리고 그 다양한 농도의 「버라이어티」는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게 호화롭다. 잡목들의 종류가 다채롭기 때문일 것이다. 비가 내리고 기온이 차질수록 그 염색은 무슨 마술처럼 신비하게 변해간다. 어제의 숲이 바로 지금의 빛깔은 아니었다. 내일 그 숲은 또 다른 빛깔의 교향곡을 보여 줄 것이다.
중앙선열차를 타고 남하하노라면 경상도경은 풍물로도 분별할 수 있다. 푸른 하늘을 찌를 듯이 뻗은 나뭇가지 끝에 빨간 초롱이 대롱대롱한다. 맑은 햇살을 받아 더 한층 돋보이는 홍시들! 그뿐 만은 아니다. 어깨가 무겁게 축 늘어뜨린 나뭇가지에 매 달린 사과, 사과…. 그 사과 숲의 빛깔은 눈망울을 얼얼하게 채워준다.
해외에 오래 머무르는 친구들은 으레 가을이 되면 부지런히 편지들을 부쳐온다. 이국의 어설픈 가을이 주는 「흠식」은 견디기 힘든 모양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풍토 속에 사는 자손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감동 속에서 따뜻한 향토애를 품게된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천연의 애국심이다. 올 가을은 여행비가 50%나 인상됐다. 그 티 없는 조국애에 응달이 지는 것 같아 어딘지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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