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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는 어디에서 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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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상언
런던 특파원

통치권자가 ‘창조경제’ 깃발을 세운 것은 영국이 원조 격이다. 1997년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집권하면서 ‘쿨 브리튼(멋진 영국)’이라는 그랜드 플랜의 핵심 정책으로 이를 들고 나왔다. 개념을 둘러싼 혼란은 없었다. ‘문화 산업을 국가 성장 동력으로 삼는다’는 분명한 방향이 제시됐다. 전통적 제조업은 포기한 것이냐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90년대에 떠오르거나 부활하기 시작한 영국의 현대미술, 영화, 대중음악, 공연 예술, 산업 디자인 등의 창조적 자원들을 산업화한다는 계획은 대중들의 희망을 부풀렸다. 블레어는 문화미디어스포츠부에 창조산업 파트를 별도로 만들고 이를 관장할 차관을 임명했다.

 한국의 창조경제는 영국과 달리 과학기술부와 결합해 이름도 거창한 미래창조과학부를 낳았다. 세계적인 디지털·정보통신(IT) 기술을 창조산업에 접목시켜 경제를 이끌도록 한다는 정권의 포부가 담겼다.

 그런데 두 나라 모두 ‘창조’의 짝을 잘못 골랐다. 영국의 창조산업이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은 문화적 자산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디지털·IT 관련 사회적 기반의 미비 탓인 측면이 강하다. 3일 전 네스타(NESTA)라는 영국의 혁신정책 개발 싱크탱크는 ‘창조경제를 위한 정책 제안’이라는 128쪽에 달하는 장문의 보고서(한국에서 논란 중인 창조경제에 대한 개념도 잘 정리돼 있다)를 내며 기술적 여건과 교육 수준이 뒤처져 창조산업이 비틀거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문제를 깨달았는지 3년 전 정권을 잡은 보수당 정부는 문화미디어스포츠부의 창조 담당 차관이 기업혁신기술부 차관도 겸하도록 조직을 정비했지만 뚜렷한 효과는 없다. 영국에는 3G 전파(아직 4G나 LTE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가 휴대전화에 미치지 않는 곳이 많다. 인터넷 속도 문제로 고급 온라인 게임을 즐기기도 어렵다. 통신업체가 망을 설치해주지 않아 인터넷 없이 살아온 옥스퍼드시 인근의 한 마을은 최근 주민들이 돈을 모아 고속 통신망을 깔았다.

 영국에 비춰보면 한국은 기술이 아니라 콘텐트 부족이 문제다. 기술로 엮을 창조적 자산들이 그다지 풍부하지가 않다. 그래서 미래창조과학부뿐 아니라 전 부처가 모두 ‘창조 총력 체제’에 돌입했다고 믿고 싶었다. 대통령의 ‘친절한 교과서’ 발언이 나오기 전까지는.

 새 교과서가 만들어지면 학생들은 두꺼운 교과서를 달달 외워야 한다. 중간·기말 고사와 대입 시험 문제가 교과서에서만 출제된다 하니 만점이 수두룩할 테고 한두 문제만 틀려도 들어가는 대학이 달라지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교과서 암기 교육에서 벗어나 창조적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교육부는 조용하다. 미국·영국 등에서는 딱히 정해진 교과서가 없는 수업도 많다는 말도 안 한다. 학원에 가지 않아도 되니 그 시간에 창조성을 키우라는 뜻인가. 우리의 창조력 육성 방안, 참으로 창조적이다.

이상언 런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