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스베틀라나 고독 속의 「여심유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편집자주> 「스베틀라나」가 미국에 망명한지 어느덧 6개월. 끈덕진 동서진영의 고전에이어 그의 수기는 판권소동까지 벌어져 분분한 화제가 되고 있다. 다음은 제3자의 눈으로 파해친 「스탈린」일가의 기록 중에서 「스탈린」과 그의 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간추린 것이다. 봉자 「빅타·루이스」는 39세의 소련인. 영국 「런던·이브닝·뉴스」지의 「모스크바」 통신원이다.
스물 네살의 젊은 여인이 「크렘린」에서 둘째 번 아기를 순산했다. 아기의 이름은 혁명의 성공을 상징하는 「스베틀라나」, 아버지 「스탈린」이 지은 이름이다.
「스베틀라나」는 「크렘린」의 두꺼운 벽 속에서 자랐다. 혜택받은 소녀시절을 맞았다. 혁명과 내란이 계속되는 소련에서 몇 만명의 국민이 추위와 식량난과 주택부족으로 고생했지만 「스베틀라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다.
자기자신에게나 남에게 대해서 용서 없이 엄격하고 너무도 진실 된 젊은 어머니 「에바」 는 아버지와 가끔 의견충돌이 있었다. 「스베틀라나」가 일곱 살 때 하루아침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사실과 이유를 안 것은 그의 나이 스물이 넘어서다.
두 남매는 보안경찰이 선정한 가정교사 하인들 속에서 자랐다. 즐겁고 밝아야할 사춘기의 전반을 어둡고 비밀에 싸인 환경에서 보냈다. 함께 「피크닉」을 즐기고 외출하던 아저씨들이 사실은 아버지의 적이었다.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든 인물 중에 「베리아」도 있었다.
그 무렵 「스탈린」은 누군가가 자기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신변경계에 신경질이 돼있었다. 그의 집을 경비하는 비밀경찰이 증강되었다. 때마침 소련공산당내부에선 큰 항쟁이 일어났고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되고 있었다.
제2차대전이 시작된 것은 그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다. 「스탈린」이 전쟁에 열을 올리는 동안 「스베틀라나」는 사춘기의 처녀로 성장했다. 그에게 최초의 연애사건이 있은 것도 이때다. 상대는 「알렉세이·가프라」. 이름 높은 영화 감독이었다.
「가프라」와 같은 기혼자가 16세의 「스탈린」 제왕의 딸 마음속에 연정의 불꽃을 일게 하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은 것이었다.
「가프라」는 유태인이었다. 「스탈린」의 분노는 크고 무서운 것이었다. 「가프라」는 하루아침 「러시아」 북극권에 있는 작은 마을로 유배당했다. 그후「스탈린」은「스베틀라나」를 「모스크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허락했다. 대학에서「스베틀라나」는「구리고리· 모로소프」와 만났다. 경제학부의학생인 「모로소프」는 유태인이었고 아버지는 외과의사였다. 첫애인 「가프라」와 다른점은「모르소프」가가 아주 일반적인 「러시아」 가정이라는 점이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졌고 「스베틀라나」는 그와 결혼 할 것을 결심했다. 「스탈린」은 할 수 없이 결혼을 허락했다. 거기엔 조건이 있었다. 그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유태인 사위「모로소프」와는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다.
45년 장남 「조셉」이 태어나자 부부는 별거했고 이어서 이혼에 합의하고 말았다.
이혼 후에도「스베틀라나」는 대학에 남았다.48년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번에는「유리·자도느프」.「스탈린」에 있어서는 당 이론상의 선배의 아들이자「스베틀라나」보다 여섯 살 위였다. 50년에 둘째 남편에게서 딸 「가짜」가 태어났다. 두 번째 남편과도 얼마 후 헤어졌다. 둘째 남편과 이혼한 후에도 그의 생활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사람은「스탈린」과 첫째애인 「가프라」였다.「스베틀라나」를 잘 알고있는 사람들은 아버지「스탈린」의 죽음이 그에게 있어 말할 수 없는 타격이었다고 말하고있다.
아버지의 죽음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번째로 받은 타격은 오빠「와시리」의「알콜」중독사였다. 그래서「스베틀라나」는 「스탈린」가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고 말았다.
「스베틀라나」는 조국소련에의 환멸을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았다. 아버지 죽음 후에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과 신념이 급작스럽게 감퇴됐다. 이런 것을 그가 말한 것은 그가 「뉴요크」에 도착해서였다.
56년 20회 당 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행한「스탈린」비판과 격하 선언을 그녀는 복잡한 심정으로 받아들였다.『나이를 먹고 역사·사회학·경제활동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깊이 공부하게되자 주위의 사물에 대해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론으로 배운 것과 실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그는 「슈코바」의 숲속을 거닐면서 자연 속에 젖어드는 것을 즐겼고 점점 자연관조를 통해서 종교에 끌리기 시작했다.「스베틀라나」는 후에 자기가 신앙의 길에 들어선 동기를 말했다. 「내가 신을 믿게된 동기는 결코 특정된 책을 읽었으나 특정인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그저 눈이 먼사람이 하루 아침 갑자기 눈이 띄어 하늘이 보이고 새가, 나무가 보였다. 이런 식으로 돌연 어떤 계시를 받은 것뿐입니다.』
63년 「슈코바」의 자기 집에서 회상록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종교적인 분위기에서였다.
64년 「스베틀라나」는 마음속으로 사랑 할 수 있는 사람과 만나게되었다.
그가 바로 「브리예쉬·싱그」 「힌즈」의 고귀한 가문출신이며 이상공산주의신봉자였다.
폐를 앓는 소련 밖의 공산주의자가 모두 그러하듯 최선의 치료를 받기 위해「모스크바」에 와 있었다. 정부가 그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마지막청춘을 걸어 불태워 보려던 인생이 어쩔 수 없는 좌초에 부닥쳤다.
「스베틀라나」는 소련법률이 인정하지 않는 상태로 동거생활로 들어갔다.「싱그」는 「스베틀라나」의 「아파트」로 옮겼다.「스베틀라나」에게 있어서는 일생을 건 사랑이었다. 두 사람의 영혼과 감정이 서로 이해 속에 젖어들었다.「스베틀라나」가 지고있는 어두운 운명은 어쩔 수 없었다.
「싱그」의 병은 회복되지 않았다.
66년 말「싱그」는 죽었다. 「스베틀라나」는 최후의 지푸라기마저 놓쳐 버린 셈이다.「스베틀라나」는 남편의 유해와 회상록을 안고 망명의 첫발을 내디디고 만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