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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탕 노린 아줌마부대는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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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지수 1천p 고지 눈앞에 둔 여의도의 ‘조용한 봄’…99년 활황 때와 달리 객장도 술집도 차분 “차부-운 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주가가 상승세를 더해가는 요즘, 여의도 풍경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돌아온 증권맨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주가는 한마디로 겁나게 오르는데, 여의도 분위기는 들뜨지 않고 조용합니다.”주가가 1천 포인트 고지를 향해 줄달음치는 요즘, 여의도에 ‘봄’은 왔으나 예상외로 ‘침묵하는, 조용한 봄‘이라는 것이다.

사실 여의도 곳곳을 둘러봐도 1999년 주가지수 1천 포인트를 오르내리던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우선 여의도 증권가 객장에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1천 포인트를 돌파하던 99년 말 2000년 초 주식 시장과는 다른 모습이다. 무엇보다 ’아줌마 군단’을 찾아 보기 힘들다. 집집마다 대출 받은 돈을 싸들고 ‘대박행 열차’를 잡아타려 객장을 오가던 진풍경은 이제 보기 힘들다.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의 선도 아래 ‘바이코리아’를 외치던 아줌마 부대의 열풍은 이젠 더이상 없다. 할아버지 부대도 객장을 떠났다. 물론 주식시장이 활황을 되찾자 사람들의 발길이 예전에 비해 잦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99년에 비하면 완연하게 조용한 분위기다.

김효상 대우증권 과장은 “과열조짐이 조금씩 묻어나기는 해도 지금의 투자 열기는 과거와는 양상이 다르다”며 “‘묻지마 투자’도 이젠 찾을 수 없고 뇌동매매도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차분함 속에 내실을 다지는 등 투자자들의 행태가 한결 성숙해진 분위기라는 것이다.

이같은 조용함 뒤에는 증권사 객장에서 북적대기보다는 사이버트레이딩 등 ‘나홀로 투자족(族)’이 한국 증시의 패턴으로 자리잡은 것도 한몫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근의 장세가 개미들의 ‘대박행진’이라기보다 기관과 외국인 투자가를 중심으로 한 ‘우량주 중심 장세’이기 때문이기에 더욱 그렇다. 주식시장이 과거처럼 ‘비합리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합리성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합리성 되찾은 시장

99년 호황기에 비해 주변에서 ‘돈 좀 벌었다’는 얘기를 듣기도 훨씬 힘들어졌다. 코스닥 상승행진이 이어지던 99년과 2000년 초 직장인들 사이엔 아침마다 “누구누구가 30배·50배를 먹었다더라”는 얘기가 모닝커피 타임의 단골 메뉴였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에 비해 개인투자자들의 성공투자 사례는 훨씬 줄었다. 외국인과 기관 중심으로 장세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을 반영하듯 여의도의 밤도 조용하다. 증권사들이 밀집해 있어 주식시장 호황의 혜택을 가장 빨리 보는 여의도의 술집들은 오르는 주가에 비해 의외로 한산했다. 1천 포인트를 달리고 코스닥 대박이 이어질 때 여의도 술집들은 그야말로 미어터지는 손님으로 정신 차릴 새가 없었다.

여의도의 술집은 카페형 술집과 단란주점이 대부분이다. 또 서비스에 비해 여의도의 술값은 그리 싼 편이 아니다. 하지만 99년 당시에는 술 한잔 걸치려 해도 한 번만에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보통 3∼4집을 들러야 앉을 자리를 찾을 정도였다. 요즘은 그때에 비하면 확실히 조용하다는 것이다.

여의도에서 단란주점을 운영하는 L씨는 “기대에 비해 손님은 들지 않아 오히려 걱정”이라며 “돈 버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너도 나도 ‘대박맞았다’며 돈다발을 싸들고 술집에서 호기를 부리던 99년과는 분위기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다.

요즘 장세는 장안의 펀드매니저들도 ‘겁나게’하는 분위기다. 도무지 언제 떨어질지 모를, 분명히 오르긴 하는데 왠지 꺼림칙한 그런 장세다. 그래서 날고 긴다는 펀드매니저들도 ‘겁나게’오르는 주가 앞에서 간이 조마조마한 경우가 없지 않다.

펀드매니저 K씨는 “주가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과거 경험 때문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것은 조심하고 있다”며 “안정적인 수익 내기에 더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증권사들은 몰려드는 뭉칫돈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긴 하지만 역시 분위기는 차분하다. 99년 당시엔 증권사 영업맨들은 ‘한몫 잡자’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연일 증시로 유입되는 고객예탁금으로 인센티브를 두둑히 받을 생각에 한껏 꿈이 부풀기도 했다. 당시 젊은 브로커들 사이엔 ‘목돈 챙겨 경영학 석사(MBA)나 하러 떠날까’는 게 유행이기도 했다.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 사이버트레이딩이 늘면서 무엇보다 증권사 영업맨들의 수익이 위협받고 있다. 수익목표 채우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영업환경이 좋아진 탓에 증권맨들의 의욕은 어느 때보다 넘쳐나고 있다. “적어도 지난해보단 성과급이 많지 않겠냐”는 것이 증권사 직원들의 기대다.

▶여의도 술집도 ‘조용’

인터넷의 증권 정보 사이트들도 조용한 편이다. 과거처럼 ‘대박 예감’‘적극 추천’등의 선동성 구호도 이젠 찾기 힘들다. 증권정보사이트 씽크풀 리서치팀의 박광수씨는 “폭락 장세를 경험한 개미들의 ‘학습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며 “나름대로 분석을 하고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이는 글이 예전에 비해 훨씬 늘어났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주가가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것이 시장 상황 변화를 알리는 대표적인 예다. 한마디로 ‘이상한’ 종목을 사서 한 밑천 잡았다는 얘기는 이젠 찾아볼 수 없다. 개인들 중 고수익을 올린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 증시 대표주를 장기 보유했다가 수혜를 본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사이버 고수로 불리는 사람들이 오히려 수익을 못낸 것도 이번 장세의 특징이다. 박씨는 “‘단타’와 ‘틈새’에 익숙한 고수들은 데이트레이딩만 하다가 손실을 보는 경우가 허다한 형편이다”라고 말했다.

반면 큰손들의 시장 복귀 움직임도 점차 빨라지고 있다. 1억원 이상 대량 주문이 최근 한달새 30%나 늘었다. 이들은 주식형 펀드에 몰리고 있는 소액투자가들과 달리 직접투자에 집중한다. 우량주에 특히 몰린다.

삼성전자·한국통신·SK텔레콤·대구가스·포항제철·한국전력·국민은행·하이닉스 등이 이들 큰손의 단골 메뉴다. 개인투자가들은 미처 손을 대기도 전에 주가가 너무 올라 소외감이 커지는 형편이다. 그래서 개미들 사이에선 “종합주가지수만 오르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형편이다.

개인투자자들의 자금은 간접투자상품으로 몰려들고 있다. 지난 9월 중순 이후 지속적인 상승을 기록한 주식형 수익증권 잔고는 최근 7조7천1백73억원대로 급증했다.

특이한 현상은 간접투자 펀드로 몰리는 개인투자자들의 자금이 외국계 투신사로 더 몰리고 있다는 것. 몇 번의 폭락장을 경험한 투자자들이 “더이상 한국 펀드매니저들은 못 믿겠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그 이유. 프랭클린템플턴 투신의 경우 지난해 말 이후 개인들의 주식형 펀드 예탁금은 3천억원 이상 늘었다.

강창희 굿모닝투신운용 사장은 최근 주식 열기에 대해 “개인투자자들은 한껏 약이 올라 있는 장세”라고 분석했다. 주가는 계속 오르는데 미처 뛰어들 새도 없이 주가가 너무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조정을 받으면 주식을 사려했는데 주식시장은 별다른 조정 국면 없이 지속적으로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들이 대거 국내 주식을 매집하며 주가가 반등했고 이 과정에서 국내 투자자들, 특히 개인투자가들은 철저히 소외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이버 고수’, 수익률 변변찮아

하지만 지금의 장세는 쉽게 꺾이지 않으리란 분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기름 부은 듯 계속적으로 주가상승이 예고되고 있다. 최근 우리 경제인 좋은 소식 일색이기 때문이다.

경제연구소들은 저마다 올 한해 경제성장률 예상치를 상향 조정하고 있고, 기업들의 체감경기에도 파란불이 들어온 지 오래다. 보수적으로 자금운용을 하는 은행들마저 주식형 펀드 판매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 주식시장의 고객 예탁금은 사상 최고에 육박하며 지난 6개월간 4조원가량 늘어났다.

지속적인 상승을 점치는 이유는 무엇보다 한국 증시는 물론, 한국 경제의 체질이 많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굿모닝투신의 강사장은 “99년 당시 주가상승 랠리와 지금은 기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며 “99년 주식 호황기엔 지금 같은 구조조정 성과도 없이, 외국인의 대거 투자도 없이 이어진 장세였다”고 말했다.

당시와 달리 지금은 초저금리 시대다. 기업들의 투자여건은 그만큼 좋아졌다. 기업들의 투명성도 훨씬 높아졌다. 기업들의 지배구조도 과거 오너 중심에서 탈피해 선진화가 진전됐다. 이제 본격적인 탄탄한 랠리가 펼쳐질 것이란 기대감이 여의도 주변에 팽배하고 있다.

얼었던 여의도는 이제 본격적인 봄을 맞을 채비에 들어가고 있다.

출처: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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