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취임날 아소 궤변 첫걸음부터 꼬인 한·일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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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관계가 갈수록 꼬이고 있다. 위안부 문제로 양국의 외교가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26일부터 이틀간 예정돼 있던 방일 계획을 취소했다. 아베 일본 총리가 A급 전범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춘계 대제 기간(21~23일)을 맞아 공물을 보낸 데 이어 각료 3명이 직접 참배하는 사태로 번지자 “이 상황에선 대화를 나눠봐야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와 관련해 복수의 외교소식통은 22일 “내각의 2인자인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상이 21일 야스쿠니를 전격 참배한 게 방일 취소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이처럼 꼬이게 된 첫 단추는 무엇일까. 외교소식통은 “이번에 방일을 취소한 배경도 아소가 전직 총리였고 아베 이후 유력한 총리 후보라는 점 외에도 그가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 후 박근혜 대통령과의 접견에서 보인 외교적 결례 때문”이라고 전했다. 일 정부 사절단 대표로 방한한 아소는 취임식 당일 오후 3시부터 청와대에서 25분간 박 대통령을 접견했다. 복수의 고위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당시 상황은 이렇다.

  인사말이 오간 뒤 박 대통령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한·일 간의 진정한 우호관계 구축을 위해 역사를 직시하면서 과거 상처가 더 이상 덧나지 않고 치유되도록 서로 노력하자.”

 그러자 아소 부총리가 돌연 미국 남북전쟁의 예를 꺼냈다. “미국을 봐라. 미국은 남과 북이 갈려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남북전쟁을 두고 북부의 학교에선 여전히 ‘시민전쟁’이라 표현하는 곳이 있고, 남부에선 ‘북부의 침략’이라 가르친다. 이렇듯 같은 국가, 민족이라도 역사인식은 일치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다른 나라 사이에는 오죽하겠는가. 일·한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걸 전제로 역사인식을 논해야 하지 않겠는가.”

 노예제 폐지를 두고 벌인 내전과 식민지 지배를 위한 침략행위를 동일시하는 궤변이었다. 순간 박 대통령의 표정이 굳어졌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특히 양국 지도자들이 신중한 말과 행동을 통해 신뢰를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짧게 응수했다. 하지만 아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박 대통령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써가며 자신의 도발적 발언을 이어갔다. 정부 당국자는 “아소는 취임 축하 사절이 아닌 마치 ‘일본의 역사관은 한국과 다르다는 걸 한국이 먼저 인정하라. 그래야 대화도 가능하다’고 훈계하러 온 듯했다”고 전했다.

 박 대통령의 분노는 나흘 뒤 표면화됐다. 그는 3·1절 기념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다”며 이례적으로 강한 톤으로 일본을 비난했다. 아소와의 접견 당시 배석했던 윤병세 장관도 “한국의 외교 우선순위는 미국→중국→일본·러시아”(2월 27일)라며 외교 수사로는 이례적인 직설적 표현을 썼다. 외교소식통은 “취임식 때 결례를 한 아소가 또다시 야스쿠니 참배라는 ‘사고’를 치자 한국 외교부로선 인내의 한계를 벗어난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고 말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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