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이 감싸 안은 비옥한 대지의 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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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호 23면

다분히 도전적이다. 맑고 깨끗하며 빛나기까지 하는 붉은색. 그 붉은 네모진 틀 속에 흰 점들이 원형으로 배열돼 있다. 그리고 이 틀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한 마리의 뱀. 뱀은 자신의 입으로 꼬리를 물어 원형을 만들었다. 뱀의 비늘은 삼각형을 겹쳐놓아 마치 고대 문자처럼 보이고 네모와 원의 모양은 어떤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심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김혁의 레이블로 마시는 와인 <13>허시(Hirsch) 빈야드

이 레이블의 주인공은 미국 소노마 코스트 지역에서 최고의 피노 누아를 생산하고 있는 허시 빈야드의 리저브 와인 레이블이다. 대니얼 허시는 1980년 소노마의 특정 지역에 포도밭을 만들어 그만의 특정한 포도를 생산하고자 노력한다. 초창기 수확한 피노 누아는 윌리엄스 셀럼(Williams Selyem)이 전량 구입, 이 품종으로 파커에게 미국에서 첫 100점을 받아 큰 명성을 얻었다. 그 후 허시의 피노 누아는 좋은 컬트급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들에만 공급하다가 2002년 허시 자신이 직접 와인을 만드는 데 뛰어들어 그의 이름을 걸고 몇 종의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 화이트 와인을 만들고 있다.

허시 와인의 레이블은 부인인 마리 허시가 디자인했다. 마리는 현재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체코 공화국 출신이다. 그녀는 남편이 좋아하는 성향을 잘 알고 있었는데, 바로 오래된 종교나 신화에 등장하는 심벌들이었다. 그래서 레이블에 오래된 심벌로서의 뱀을 디자인했다. 뱀이 자신의 꼬리를 먹고 있는 이 심벌의 이름은 우로보러스(Ouroborus). 재생과 영원 그리고 우주를 뜻한다.

고대 심벌에서 뱀이나 용들이 자신의 꼬리를 먹고 있는 원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우주의 순환, 스스로를 재창조한다는 뜻으로 서양에서는 불사조와도 맥을 같이했다. 원시시대부터 나타난 이 심벌은 종교나 신화에 자주 등장했다. 특히 이집트에서 그 오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허시가 심벌로서만 뱀의 이 같은 모양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허시는 말한다.

“뱀은 전통적으로 비옥함과 가능성, 잠재성, 건강의 심벌입니다. 우리 레이블에서 뱀의 의미는 대지와 대지를 구성하고 있는 재료이며 이 자체가 주변의 포도나무를 키워주는 것이지요. 결국 토양의 잠재력은 포도나무를 통해 포도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농부로서 와인 메이커로서 이처럼 유니크한 장소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와인을 통해 표현해내는 것이 우리의 직업입니다. 이것은 또한 왜 레이블에 뱀이란 심벌을 쓰게 되었는지 말해주는 것이지요.”

실제로 허시는 처음 포도밭을 고를 때 지역 특성을 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곳을 선택했고 그의 선택은 소노마 코스트의 특징인 습한 겨울과 건조한 여름, 적은 강우량의 기후 조건과 어울리며 최고의 피노 누아를 생산할 수 있었다.

레이블에 사용한 맑고 유혹적인 붉은색은 네모난 그의 대지 위에서 빛나고 있으며 그 대지의 가능성과 잠재성을 뱀이 감싸고 있다. 이 대지에서 태어난 피노 누아에서는 선명한 과일의 기운과 감칠맛 나는 산미가 서로 균형을 이루며 섬세한 맛을 보여준다. 필자는 이 와인을 마시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뱀들이 이 대지에 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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