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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필론의 돼지가 되고 싶지 않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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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매체경영

제대병 100여 명이 탄 귀향열차에서다. ‘검은 각반’으로 묘사된 특수부대 현역 4명이 들이닥쳐 노래를 한 곡 뽑고는 돈을 요구한다. 기성세대에게는 쉬이 상상이 되는 과거의 귀향열차 풍경이다. 폭행과 수모를 당하며 용기 없고 쓸개 빠진 100여 명의 제대 군인들은 지폐를 건넨 뒤 강제적으로 사례 술잔을 받아 마시거나 아니면 철저하게 외면한다. 물론 분을 참지 못해 대드는 인물도 있다. 창백하고 깡마른 한 군인이 ‘검은 각반’의 하극상에 맞서지만 패거리 주먹에 피를 흘리며 처참하게 두드려 맞자 기차 안은 순간 침묵만 감돈다.

 그러나 상황은 이대로 끝나지 않았다. 한 제대병의 “야, 삼 년간 당한 것도 분한데 끝나는 오늘까지 당하고만 있을 거여!”라는 외침이 계기가 된다. 이 말에 용기백배한 제대병들이 우르르 ‘검은 각반’들에게 달려든다. 겁에 질려 양심을 외면하던 가슴속에 숨겨져 있던 광폭함과 잔혹성까지 폭발한다. 묵사발이 된 ‘검은 각반’들이 ‘형님들 살려주십시오’라고 애걸복걸하지만 사방에서 날아드는 발길과 주먹은 끝이 없다. 드디어 ‘검은 각반’은 새우처럼 몸을 구부린 채 혼절해 버린다. 이문열의 소설 ‘필론의 돼지’ 줄거리다.

 제대병들은 그날 사건을 어떻게 말할까. 최소 요구 금액을 상납하고, 그래서 폭력과 술잔 어느 쪽으로부터도 유예됐던 사람들은 각반들로부터 받은 모멸은 슬쩍 뺀 채, 두들겨 팼던 이야기만 신나게 할 것이다. 각반들에게 맞섰던 용기 있는 자는 지금도 순탄치 못한 생을 살아가고, 요구 금액의 서너 배를 내고 답례 술잔까지 받았던 굴종형 제대병은 새로운 세상에 보란 듯이 금방 적응할 것이다. 중간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던 다수의 제대병들 역시 자신이 마치 그날의 영웅인 양 떠벌릴 것이 틀림없겠다. 모두가 ‘화려했던 과거’를 주장하고 있음에도 ‘인류 역사’가 화려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문열은 이 같은 분석을 바탕으로 부도덕한 권력과 불합리에 맞서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우회적으로 그렸다. 현실비판 의식이 날카롭게 드러난 작품이다.

 김중수 한은 총재가 금리동결 결정으로 인해 사면초가다. 청와대, 경제부처, 집권당 대표가 번갈아 가며 압박하고 있다. 겉으로는 “금리 정책은 한은의 고유 권한이므로 존중할 수밖에 없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엄청 불쾌한 모습이다. “한은이 정부의 러브콜을 외면했다. 정부정책에 맞서 금리를 동결하는 게 무슨 독립운동이나 되는 줄 착각하고 있다. 비뚤어진 영웅심리 아니냐”는 등등 모멸적인 인신공격까지 해댄다. 이참에 총재를 갈아 치워야겠다는 극히 무례한 말까지 하루가 다르게 등장한다.

 그러나 흔히들 BOK(Bank of Korea)로 불리는 한국은행은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이다. 감사원도 그렇듯이, 중앙은행이 정치권과 정부의 입김으로부터 흔들리는 모습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앙은행이 적절한 통화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선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명제는 중학교부터 배워 왔다. 정치권의 입김 아래 놓인 중앙은행이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금리를 결정하는 한은총재와 금융통화위원회의 결정이 항상 옳지 않을 수도 있고 또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의 독립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은 여러 실증연구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중앙은행 총재가 이른바 “국정철학”을 이유로 교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불행하다. 인사에 관한 한 빵점이라던 이명박정부도 참여정부 때 임명된 이성태 총재를 쫓아내지는 않았다.

 “필론이 한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배가 바다 가운데서 큰 폭풍우를 만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배 안은 곧 아수라장이 됐다. 필론은 현자인 자기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배 선창에는 돼지 한 마리가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결국 필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뿐이었다.” 나는 필론의 돼지가 되고 싶지 않다.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매체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