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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박근혜, 기억하라 1997 그리고 김대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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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논설실장

외환위기의 공포가 엄습하던 1998년 1월 중순의 늦은 저녁. 비장한 표정의 두 남자가 서울 여의도 한국투자신탁 15층의 한 사무실에서 첫인사를 나눴다. 김용환과 정덕구였다. 김용환은 김대중(DJ) 대통령 당선인과 김영삼 대통령이 합의해서 구성한 비상경제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이었고, 정덕구는 김영삼 정부 재정경제원의 차관보였다. 김용환은 외채협상단 수석대표, 정덕구는 외채협상 실무협상단장 자격으로 만난 것이다. 김용환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무실 불을 껐다. 면접이 시작됐다. 외환 수지를 포함한 핵심 경제지표와 외채협상 전략을 묻는 김용환의 날카로운 질문과 정덕구의 빈틈없는 대답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30분이 지나자 불이 켜졌고, 옆 방에 있던 비대위 기획단장 이헌재가 들어왔다. 김용환이 말했다. “이 사람에게 맡기면 되겠어.” 정덕구가 면접에서 ‘합격’하는 순간이었다.

 김용환은 왜 검증된 엘리트 경제관료 정덕구를 다시 검증하고 싶었을까. 지난 주말 김용환에게 물었다. “여차하면 내가 직접 실무협상단까지 맡을 생각이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정덕구는 사명감과 애국심이 투철한 것으로 평가됐다. 그래서 실무협상은 전적으로 정덕구에게 맡기고 자신은 미국 정부에 당선인의 입장을 전달하기로 역할까지 분담했다. 김용환은 그렇게 철저한 인물이었다. 박정희 정부의 재무장관으로서 1974년 석유파동 직후의 외환위기를 해결했던 자신감과 무한한 책임감이 가슴과 머리를 지배했던 것이다. ‘암흑 속의 테스트’에서 살아남은 정덕구는 며칠 뒤인 1월 18일 뉴욕으로 날아가 김용환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단기외채를 장기로 전환하는 실무협상을 성공시키고 국가부도 위기를 막았다.

 1997년 국가부도 위기 상황 속에서 당선된 DJ는 적어도 초기 인사에서는 내 사람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는 대선에서 손잡은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브레인인 김용환 수석부총재를 신뢰했다. DJ는 경제팀 인선과정에서 김용환에 의존했고, 김용환도 사심 없이 인재를 모았다. 김용환은 정작 자신에 대한 DJ의 입각 제의는 끝까지 고사했다. DJ는 대선에서 자기와 경쟁했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캠프에 몸담았던 이헌재를 비대위에 참여시킨 뒤 초대 금융감독위원장으로 앉혀 기업구조조정의 전권을 행사하게 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규성을 재경부 장관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이헌재는 “DJ는 나를 동지가 아니라 기술자로 발탁했다”고 했다. 살아온 과정은 달랐지만 국익 앞에서는 하나가 됐다.

 지금 박근혜 정부의 인사가 실력 위주로 제대로 됐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에 대해서는 “차라리 해녀를 장관 시키는 게 낫다”라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백번 양보해서 지금이 태평성대라면 어쩔 수 없이 눈감아줄 수 있다. 그러나 명백한 위기 상황이다. 15년 전에는 나라의 곳간에 부족한 달러를 채워 넣으면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단기 위기 상황이었다. 지금은 눈 앞에선 북한의 핵도박과 개성공단 폐쇄 위협이 춤을 추고, 돌아서면 엔저의 거센 파고가 수출의존형 한국 경제를 위협하고, 저성장과 고령화의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운 상시적 위기 국면이다. 그런데도 위기를 관리하는 비상한 각오가 인사에서 보이지 않는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은 초반의 실점을 거뜬히 만회할 능력이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려는 자세, 용기와 결단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진지한 중간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먼저 DJ의 집권 초기 인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DJ는 자신을 그토록 탄압했던 박정희가 키운 사람이었음에도 김용환을 신뢰했다. 김용환은 박정희 정부에서 4년3개월간 재무부 장관으로 일했고, 석유파동 직후의 외환위기를 해결했다. 그런 김용환의 경험과 능력, 애국심을 DJ가 활용했던 것이다. DJ가 97년에 발생한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은 결과적으로 박정희의 도움을 받은 셈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된 DJ는 박정희의 분신인 박근혜에게 선대에 진 빚을 갚겠노라 손짓하고 있을 것이다.

 1992년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클린턴도 집권 초기 인사 실패로 고전했다. 초대 비서실장에 유치원 때부터의 친구를 기용했지만 지지율 급락을 겪었다. 그래서 아예 공화당 출신인 데이비드 거겐을 정치고문으로 영입해 국민과의 소통을 활성화했다. 그는 닉슨·포드·레이건 등 3명의 공화당 대통령을 보좌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클린턴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거겐은 저서 『권력의 증인』(Eyewitness to Power)에서 대통령이 성공하려면 취임 초에 국정을 장악하고 유능한 참모를 두어야 한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집권 초반기의 DJ 용인술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이하경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