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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교는 버리고 정성 수북히 묵직한 경양식의 맛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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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호 22면

1 데미그라스의 시그너처 메뉴인 햄버거스테이크. 재료, 양념, 점도 모두 훌륭한 수준이다.

나이가 들면서 인생 2막을 고민하는 남자들이 많다. 사회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가야만 하는 세월을 정신 없이 살아내고 나면 이미 중년이고 어느덧 인생 마무리를 생각해야 할 때가 된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잘 살 것인가, 나에게 좀 더 의미 있는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홍역처럼 앓게 되는데 그 감염 정도에 따라 처방이 달라진다.

주영욱의 이야기가 있는 맛집 <14> 종로 팔판동 데미그라스

가볍게 앓는 사람들은 없던 취미 생활을 시작한다. 사진 공부를 시작하고, 색소폰 학원에 등록하고, 자전거 여행을 한다. 증상이 심각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늦기 전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더 의미가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과감하게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분을 한 분 만났다.

괜찮은 경양식 집이 한군데 있다고 해서 호기심에 한번 찾아가 봤다. 작은 레스토랑이었는데 주인 겸 요리사인 중년 남자가 직원 한 명과 단 둘이 운영하고 있었다. 메뉴도 달랑 다섯 가지, 함박스텍, 비후까스, 그라탕, 카레라이스, 새우 튀김이 전부였다(함박스텍은 햄버거 스테이크, 비후까스는 비프 커틀렛이 맞는 말이지만 ‘경양식’ 집에서는 그렇게 부르면 맛이 안 난다).

뭔가 엉성해 보였는데 막상 음식을 먹어보니 아주 맛이 있었다. 전혀 기교를 부리지 않고 그저 소박하게 만들었지만 정성이 가득하다는 느낌이 절로 드는 음식들이었다.

2 모든 요리는 김재우 사장 본인이 직접 만든다. 그래서 손님이 한꺼번에 많이 오면 걱정부터 앞선단다. 3 데미그라스 내부 풍경. 화려하진 않지만 아늑한 아지트 같은 느낌이다.

특히 함박스텍은 아주 훌륭한 수준이었다. 부드러우면서 씹히는 맛이 적당하고 양념이 감칠맛 있었다. 그 맛에 반해 몇 번을 다니다가 주인 되는 분과 수인사를 트게 되었다. 그런데 세상에! 이 분은 전문 요리사도 아니고 심지어 요리를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되는 초보였다. 서울 삼청동 부근 팔판동에서 ‘데미그라스’라는 식당을 운영하는 김재우(47) 사장이다.

정통 증권맨이 날린 , 돌직구 맛 승부수
김 사장은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증권회사에서 20년을 근무한 정통 증권맨이었다. 고객들에게 투자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자금을 운용해 주는 영업직을 오랫동안 해 왔다. 하루 하루가 전쟁터 같은 실적과의 싸움이었다. 그래도 오래 해오면서 나름 안정은 되었는데 어느 날 자신이 너무 피곤하고 지쳤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시장 환경이 안 좋아지면서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던 참이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 식당이었다. 어릴 적부터 음식에 관심이 많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식도락 동호회 활동도 아주 활발하게 했었다. 그동안 정신 노동에 시달려 왔으니 이제는 몸을 직접 움직여서 하는 순수한 노동을 한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서 즐겁게 살아가면 인생이 더 행복해질 것도 같았다.

결정을 내리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것은 부인이었다. 너무 힘들어 하는 것을 많이 보아 왔던 탓에 선뜻 당신 원하는 대로 하라고 격려를 해줬다. 마침 알고 지내던 후배가 식당을 오픈해 거기서 잡일부터 시작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저녁에는 그곳으로 가서 일하는 생활을 육 개월 정도 하다가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종업원 생활을 했다. 주인과 직원 두 명의 작은 규모여서 여러 가지 일들을 배울 수가 있었다. 식당 운영에 필요한 기본을 배웠고 몇 가지 요리들도 배웠다. 일본 요리 책들을 혼자 보면서 공부도 했다.

그렇게 일 년 정도 일을 한 다음에 독립해서 지금의 작은 식당을 차린 것이 2012년 2월이다. 만들 수 있는 요리들로만 소박하게 시작을 했다. 변화구를 모르니 직구로만 승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온 힘을 다해서 던지는 돌직구. 원가는 신경 쓰지 않고 좋은 재료를 써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요리를 해서 내놓았더니 다행히 스트라이크가 자주 나왔다. 인정해 주고 자주 찾는 단골들도 벌써 꽤 생겼다. 아직 손님들이 꾸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 년 만에 생각보다는 빨리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아 나름 자신감을 계속 쌓아가는 중이다.

‘데미그라스’는 경양식에서 많이 쓰이는 소스 이름이다. 여러 번 졸여 만들어서 진한 맛을 낸다. 이 이름처럼 김 사장이 자신을 여러 번 졸이는 단련의 과정을 반복해 가면서 진한 진국의 맛을 낼 수 있는 오너 셰프로 성공했으면 좋겠다. 자신을 위해, 믿어준 가족을 위해, 그리고 같은 고민을 하는 수많은 ‘사오정’들의 용기를 위해.

**그릴 데미그라스(Demiglase) 서울시 종로구 팔판동 128번지 전화: 02-723-1233
(*좌석이 많지 않아서 예약을 미리 하는 것이 좋다. 매주 월요일은 쉰다.)



음식, 사진, 여행을 진지하게 좋아하는 문화 유목민. 마음이 담긴 음식이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마케팅·리서치 전문가. 경영학 박사 @yeongs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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