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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각탑 폭파 가장 포토제닉" 5년후 김정은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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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008년 6월 27일 오후 5시5분 북한은 영변의 냉각탑을 폭파했다. 이날 냉각탑 폭파는 북한이 핵무기개발 의사가 없음을 전하는 상징적 이벤트로 기록됐다. [신화=AP, 교토통신=로이터 ]

북한은 지난달 31일 열린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경제건설과 핵 개발을 병행하는 노선을 채택했다. 이틀 뒤인 2일 북한 원자력총국 대변인은 “우라늄 농축공장을 비롯한 영변의 모든 핵 시설과 가동을 중지했던 5㎿ 흑연감속로를 재정비·재가동하겠다”고 선언했다. 북한은 이날 내각의 경제관료를 대폭 교체한 최고인민회의 12기 7차 회의(1일 평양 만수대의사당) 결과도 관영 매체를 통해 공개했다. 북한 내 개혁파로 분류되는 경제관료 박봉주를 총리 자리에 6년 만에 컴백시킨 것과 궤를 같이한 조치다.

 이날 원자력총국이 재가동을 밝힌 5㎿ 원자로는 1986년 말 가동에 들어간 북한의 첫 핵 시설이다. 북한은 2007년 ‘2·13 합의’(핵 동결 대가로 중유 100만t 대북지원 등) 등에 따라 5㎿급 원자로와 핵 재처리시설, 핵 연료공장 등에 대한 폐쇄 및 봉인조치를 취했다. 이를 재가동하겠다는 건 핵무기 제조용 플루토늄을 추출하겠다는 통보다. 여기에 영변단지 내 고농축우라늄(HEU) 방식의 핵 개발 시설까지 가동하겠다고 밝혀 추가적인 핵 능력을 갖추겠다는 의도도 드러냈다. 핵 동결 약속을 전면 파기하겠다는 의미다.

 북핵 문제를 다뤄온 정부 당국자들 사이에서는 “세기적인 이벤트로 주목받았던 영변 원자로 냉각탑 폭파가 결국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위한 시간 벌기에 불과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2008년 6월 27일 오후 5시5분 평안북도 영변의 핵 단지에서는 냉각탑 폭파 행사가 열렸다. 높이 20여m의 원통형 구조물이 폭음과 함께 몇 초 만에 무너져내리자 미 참관단 대표인 성 김 국무부 한국과장(현 주한 미국대사)은 “냉각탑 폭파는 북핵 불능화의 매우 중요한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AP통신은 “냉각탑 폭파는 (2003년 6자회담 시작 후) 5년 이상 끌어온 북핵 협상 과정에서 가장 포토제닉한 순간”이라고 타전했다. 북핵의 상징물이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는 게 당시 분위기였다.

 그로부터 6년 뒤 북한은 영변 핵 시설의 재가동을 선언하면서 결과적으로 당시 평가를 뒤집었다. “자립적 핵동력공업을 발전시켜 나라의 긴장한(부족한) 전력문제를 푸는 데 이바지하겠다”는 게 북한 측 주장이다. 정부 당국자는 “김정은이 당 전원회의에서 병진(竝進)노선의 구체적 과업 중 하나로 ‘자립적 핵동력공업 발전 및 경수로 개발 사업 추진’을 언급한 데 따른 후속조치로 보인다”고 말했다. 향후 경수로발전소 건설 카드도 들고나올 수 있다는 게 정부 당국의 판단이다.

 3월 한 달간 대남도발 위협 카드를 잇따라 내놓은 김정은은 이달 들어 경제 챙기기 쪽으로 선회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최고인민회의에서는 경공업 분야를 맡아온 박봉주를 총리에 임명했다. 과거에도 총리를 지낸(2003년 9월~2007년 4월) 박봉주는 2002년 9월 경제시찰단으로 서울을 다녀가고, 같은 해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추진해 개혁 성향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김정은은 수산·화학공업·원유공업·국가자원개발 등 경제부처를 중심으로 10여 명의 장관급 인사도 교체했다. 특히 지난해 10월 농업상에 임명된 황민을 반 년 만에 해임하고 새로 임명한 이철만을 부총리급으로 격상시킨 대목이 눈길을 끈다. 정부 당국자는 “자신의 뜻대로 경제, 특히 농업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데 따른 불만을 대폭 물갈이 인사로 표출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정은은 지난해 4월 첫 공개연설에서 “인민들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이런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주민들이 체감하는 건 핵 도발로 촉발된 대북제재에 따른 경제난과 전시동원체제로 인한 피로감이다. 김정은은 후계자 시절인 2009년 11월 말 화폐개혁을 주도했다가 주민들의 반발로 실패한 전력이 있다.

 경제라는 명분에 핵 개발을 연결시킨 김정은의 구상에 대해 정부 당국은 회의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박봉주 총리 기용으로 볼 때 김정은이 경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틀림없지만 결과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종·정원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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