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여배우가…" 韓쌍둥이 기적같은 만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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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영화배우 서맨사 푸터먼(왼쪽)과 영국에서 패션 공부를 하고 있는 프랑스인 디자이너 아나이스 보르디에(오른쪽). 왼쪽은 인터넷에 올려진 서맨사의 프로필 사진, 오른쪽은 서맨사가 유튜브에 올린 아나이스의 모습. [킥스타터 홈페이지]

인터넷 화상채팅의 창이 열리자 대서양 너머 두 사람은 동시에 전율했다. 서로의 모니터에 나타난 상대는 긴장과 반가움이 교차하는 표정까지 꼭 닮은 모습이었다. 말도 필요 없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여배우와 영국 런던의 패션디자이너, 26세 동갑내기 두 사람은 단번에 자신들이 쌍둥이 자매임을 확신했다. 바다 건너 8700㎞의 거리도 핏줄의 질긴 인연을 끊지 못했다.

 지난 2월 말 화상채팅의 두 주인공은 미국인 서맨사 푸터먼과 프랑스인 아나이스 보르디에. 기적 같은 두 사람의 만남은 운명처럼 시작됐다.

 지난해 말 아나이스는 학교 친구들로부터 “너랑 똑같이 생긴 미국 배우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혹시 언니나 동생 아니냐”는 얘기도 들었다. 아나이스는 친구들이 얘기했던 ‘게이샤의 추억’ ‘21 앤드 오버’ 등의 영화를 찾아봤다. 정말 자신이 연기하는 듯 똑같은 얼굴의 배우가 나타났다. 영화 속 인물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서맨사 푸터먼, 1987년 11월 19일 출생, 한국에서 입양…. 아나이스의 눈과 몸이 굳었다. 생년월일이 같았다. 한국에서 태어나 입양된 사실까지도 일치했다.

 아나이스는 2월 21일 페이스북을 통해 서맨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같은 날 부산에서 태어나 넉 달 뒤 프랑스 파리 근교의 가정에 입양됐으며 한국 이름은 김은화’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페이스북에 실린 자신의 사진들을 봐달라고도 했다.

 아나이스의 사진을 본 서맨사도 놀랐다. 그는 인터넷에 올린 글에 “느닷없이 닥쳐온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당시를 표현했다. 자신 역시 부산에서 태어나 넉 달 뒤 미국 버지니아주로 입양됐다고 아나이스에게 알렸다. 둘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연락하며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단신 콤플렉스(서맨사 1m51cm), 유제품 소화장애, 늦잠 뒤 폭식 습성 등 공통점이 드러났다.

 둘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아니, 아직 만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사연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겠다는 서맨사의 계획 때문이다. 서맨사는 지난달 21일부터 인터넷 펀드 모금 사이트 ‘킥스타터’를 통해 제작비를 마련하고 있다. 열흘 새 목표액 3만 달러(약 3300만원)를 초과하는 돈이 쌓였다. 둘은 곧 ‘서맨사와 아나이스’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제작에 돌입한다. 조만간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만나 친족 확인 유전자 검사도 받을 계획이다. 아나이스는 “서맨사를 만나는 장면을 매일 머릿속에 그리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어쩌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제각기 성장하게 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나이스는 홀트아동복지회, 서맨사는 스펜스-채핀 센터라는 단체를 통해 입양됐다. 한국의 생부모가 둘을 따로 맡겼을 가능성이 있다.

 서맨사와 아나이스는 미국과 프랑스라는 동떨어진 환경 속에서 자라났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이 예술적 재능을 펼치는 삶을 살아왔다. 아역배우 출신인 서맨사는 미국 보스턴대에서 드라마를 전공했다. ‘게이샤의 추억’에서 주인공 치요의 언니 사츠를 연기한 그는 최근엔 인터넷 드라마 ‘케브줌바’로 인기를 얻고 있다.

회계사·교사 부부의 가정에서 고명딸로 큰 아나이스는 파리의 국립응용예술대(ENSAAMA)를 졸업한 뒤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대에서 패션 전문가 과정을 밟고 있다. 이 학교는 알렉산더 매퀸, 존 갈리아노 등의 유명 패션디자이너를 배출한 곳이다.

런던=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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