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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학생 칼럼

안타까운 건 알면서 부끄러운 건 모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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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임지수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익숙한 엇박자의 발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진다. 내 친구 P다. 학점 4.2, 토익 만점, 일본어능력시험(JPLT) 1급. 그야말로 엄친아다. 그리고 나는 그의 학습도우미다. 지체장애 2급을 가진 P의 필기를 돕는 것이다. P는 책장 넘기기도 어려워하면서 교재의 몇 페이지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다 외우는 대단한 친구다.

 “JM이 뭐야?” 함께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다가 급상승 검색어를 본 P가 물었다. 나는 일종의 유행어 같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누나도 잘 모르네. 클릭해보자.” JM은 대학생들이 장애인을 흉내 내며 자기를 소개하는 행위를 말한다. 얼마 전 서울의 한 대학 학생들이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들에게 JM을 요구했다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기사를 정녕 P와 나란히 앉아 읽어버린 것이다.

 “와, 진짜 뭐 이런 게 다 있노. 기가 막히네.” 나는 당황하면 나오는 부산 사투리까지 써 가며 화를 냈다. 그런데 P는 화내지 않았다. 무기력한 표정으로 연신 눈을 깜빡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얼어붙은 분위기에 마우스 클릭 소리가 PC실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항상 밝고 당찬 P가 그렇게 힘없이 흔들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녀석의 입을 틀어막은 무력감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번 일로 가해 남학생들의 학교가 통째로 욕을 먹기 시작하자 여학생 측은 개인의 잘못 때문에 그 집단까지 욕하진 말자고 자제했다. 하지만 사실 비난은 보다 더 큰 우리로 향할 필요가 있다. 이 사건에 많은 사람이 분노했다. 어떻게 배울 만큼 배운 것들이 그럴 수 있느냐는 비난부터 부실한 인성 교육에 대한 성토까지. 그런데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몇몇 댓글들이었다. ‘저런 OO짓 하는 놈들이야말로 인격 장애인’ ‘노는 수준이 장애인이네’. 장애인 비하를 비난하는 댓글들에 버젓이 장애인 비하가 섞여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은 알까. 이런 분노 때문에 정작 P와 같은 장애인들은 불편한 현실에 분노할 힘마저 잃어 간다는 걸. 사람들이 진정한 문제의식 없이 던지는 돌멩이에 엄한 장애인들이 맞고 있다는 걸.

 우리는 이렇게 무디다. 유명 정치인의 장애인 알몸 목욕 사건에 혀를 차고 영화 ‘도가니’를 보며 눈물 흘린다.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비하와 조롱이 그득한 우리의 언어 생활을 돌아보면 장애인은 결핍과 비정상의 표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어쩌면 이렇게 연민과 조롱의 두 얼굴로 가득한 이 사회에 적응해버려서 장애인들은 화가 나도 조용히 체념해버리는 건 아닐까. 정상인으로서 비정상인에 대해 갖는 측은지심(惻隱之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우리가 다르지만 닮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서로 대등한 관계로 인식하자. 다름이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되고 비정상이 웃음거리가 되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바로 수오지심(羞惡之心)이다.

임 지 수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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