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의 참회록(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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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저의 집안은 원래는 지내기가 괜찮았습니다. 저는 이른바 일류 라는 학교를 국민학교로 부터 중학교 그리고 대학교까지 일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간판도 저에게는 별것이 아니었습니다. 역경은 거듭될 뿐이었습니다. 3년이나 무직으로 지내던 끝에 얻은 직장이었습니다. 돌아온 아우를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돌봐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수양을 하라면서 낚싯대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순탄한 2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괴벽은 다시 되살아났습니다. 그는 백원, 2백원을 뜯어 서울로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던 중 징집 영장이 날아들었습니다. 좀 쑥쓰러운 얘기지만 집안에선 모두 반가와 했습니다. 군대에 가서 사람이 되어 오면 하고. 그러나 이런 기대가 1주일 후 귀향증을 백원에 잡히고 돌아온 아우의 모습으로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가 나빴다는 것입니다.
그 후로 아우의 행패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뜯어 가는 돈이 5백원, 1천원으로 커져갔고 제 처를 협박하고 직장으로 저를 찾아와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는 맨주먹으로 집의 유리를 깼습니다. 할 수 없이 창을 창호지로 모두 갈아 발라야했습니다. 저는 가끔 감방의 창문을 바라보며 집의 창문 생각이나 「아이러니」를 느낍니다.
아우는 무슨 생각에선지 자동차 학원에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1만3천원의 제 봉급에서 입학금과 실습비를 떼 주었습니다. 매달 학비를 가져갔습니다. 석 달째 학원에 가보았습니다. 아우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실습비를 달라고 왔습니다. 아무 소리않고 지금의 처가 올 때 가져온 양단 치마를 주었습니다. 나가는 그를 잡고, 정신을 바로잡고 철공장이라도 들어가라고 타일렀습니다. 며칠 후 또 그는 왔습니다. 저는 매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우가 달려들어 한달 동안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저의 손가락을 다쳤을 뿐입니다. 그는 마을 전체에 저의 식구가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도록 행패를 부렸습니다. 딸의 집에 다니러 온 장모에게 돌 팔매질을 하여 남의 집에 사는 처지에 온 집안이 공포에 떨었습니다.
이즈음 이번 사건에 이해 없이 누를 입게 된 이석암씨가 등장했습니다. 이씨는 당시「트럭」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께 신신 당부하여 아우를 그 차의 조수로 써 주도록 부탁, 일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집에서 용돈까지 주고 달랬습니다.
그러나 1주일 못 갔습니다. 그 자리도 그만 두었습니다. 그는 저의 직장에 취직을 시키라는 것입니다. 병역 관계로 안 된다니 제가 그만 두고 그 자리에 넣으라는 때였습니다. 제가 출퇴근 길에서 그에게 맞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집에 들어갈 수 없어 이석암씨에게 집에 가봐 주도록 한 일도 부지기수입니다. 아우는 달래도 달래도 횡포해지고 칼부림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다시 집에서 자동차 학원에 강제로 집어넣다 시피하여 월 8천원씩을 주었습니다. 이번엔 4개월의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는 술을 닷 되 가량 해치우는 대주가였습니다만 이때쯤 여색도 밝히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미를 알고 돈을 끊은 후 어느 날 아우는 회사로 찾아왔습니다. 정문에 나가니 『청춘을 「엔조이」해야겠다. 돈을 내지 않으면 죽인다.』하기에 그런 돈이면 더욱 못 주겠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과도로 저의 가슴을 찌르려 하였고 피하자 계속 달려들어 저는 팔을 두 번 찔렸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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