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제 그림은 靑綠色(청록색), 점밖에 없어요. 왼편에서 한줄기 점의 파동이 가고, 또 그 아래, 또 그 아래, 그래서 온통 점만이 존재하는 그림이야요. 붓을 들면 언제나 서러운 생각이 쏟아져 오는데 왜 나는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참 모르겠어요. 창밖에 빗소리가 커집니다.”
1966년 2월 뉴욕의 수화(樹話) 김환기(1913~74)는 서울의 이산(怡山) 김광섭(1905∼77)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세계 무대에서 스스로를 시험하고자 홍익대 교수도 그만두고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간 수화는 고국을 몹시 그리워했다. 그 창구는 이산이었다. 성북동서 가까이 살며 교분을 나눴던 이산으로부터 받는 소식, 이산의 시를 통해 수화는 위로받았고 이를 작품으로 승화했다. 대표적인 게 이산의 시 ‘저녁에’를 모티브로 그린 대형 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다.
뉴욕 시절의 수화가 이산에게 보낸 편지 12통이 처음 공개됐다. 편지는 1965년 11월말부터 시작한다. 일곱 달 전 수화는 이산이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부음으로 오인해 충격을 받았었다. “부디 서러워 마시고 빨리 健康(건강)해지셔서 환희에 찬 싱싱한 詩(시)를 써 주십시오. 빨리 돌아가고 싶지만 왜 돌아가지 못하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이렇게도 털어놓았다. “빨리 이 봄에 詩集(시집)을 내야 해요. 그리고 한 권 보내주셔요. 석판화를 넣어 호화판 畵集(화집)을 제가 다시 꾸며 보겠어요. 이것은 장기계획-제가 서울에 가지는 날, 그것도 딸라를 좀 쥐고 가지는 날 자비출판 하겠어요. 한 권에 3만원짜리 화집을 내야겠어요. 되도록이면 비싸서 안 찾는 책을 내고 싶어요. 이런 것이 미운 세상에 복수가 될까.”(1966년 2월 24일)
화가는 타국에서 외로웠고, 곤궁했다. 편지마다 시인에게 “시를 써 주세요” 독려했던 것은 곧 스스로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채찍질하는 거였을 터다.
편지는 미술사가 황정수씨가 갖고 있던 것이다. 전기작가 이충렬씨가 본지에 알려왔다. 간송(澗松) 전형필(1906∼62), 혜곡(兮谷) 최순우(1916∼84) 등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을 찾았던 이들의 전기를 써온 그가 이번에 매달린 인물은 탄생 100주년을 맞는 김환기다. 『김환기-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유리창)를 출간했다. 저자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수화뿐 아니라 파리·뉴욕 등지에서 평생 그를 내조한 부인 김향안(1916∼2004)씨에 대해서도 입체적으로 서술했다.
김향안씨는 남편과 사별 후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설립하는 등 수화를 미술사의 한 부분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본명은 변동림, 시인 이상(1910∼37)의 부인이자 화가 구본웅의 서이모(庶姨母)이기도 했다. 김환기와 결혼한 뒤 남편이 쓰던 호 향안(鄕岸)을 이름으로 삼았다. 전기는 김환기 관련 저작권을 갖고 있는 환기재단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출간됐다. 해서 이산과의 편지 부분도 책에는 싣지 못했다.
권근영 기자
◆김환기 탄생 100주년=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환기미술관에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전(6월 9일까지)을 열고 있다. 인터넷 포털 네이버에선 온라인 특별전을 연다. 근대문화재로 지정된 ‘론도’ 등 대표작 50여 점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