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서 정상회담 합의 … 강경파에 밀려 뒤집어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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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인택 통일부 장관(오른쪽)이 2009년 8월 22일 서울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 부장을 면담했다. 김 부장은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을 위해 일행과 함께 서울을 찾았다. [중앙포토]
임태희(左), 천영우(右)

2009년 10월 17일 오후 9시쯤 싱가포르 세인트 레진스 호텔. 이곳에서 비밀리에 만난 이명박 대통령 특사인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 부장은 3차 남북 정상회담 개최와 관련한 6개 항의 의제에 잠정 합의했다. 여기엔 이명박 대통령이 한 달 이내에 평양을 방문해 제3차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한반도 비핵화, 납북자·국군포로 송환 등 남북 문제를 포괄적으로 논의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전 정상회담의 의제와 비교하면 파격에 가까운 진전이었다. 국정원 고위 당국자 등과 함께 ‘싱가포르 접촉’ 현장을 지켜본 B씨의 증언이다.

 “그동안 논의 자체를 거부해오던 핵문제에 대해 북한이 전향적으로 나왔습니다.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해 6자회담 중단 때보다 한 단계 진전된 수준에서 핵문제를 풀어나간다’는 선에서 의견 접근을 봤습니다. ‘납북자와 국군포로가 고향을 방문하며, 정상회담이 끝난 후 시범적으로 국군포로 ○명(한 자릿수)을 송환한다’는 대목도 있었죠. 무엇보다 정상회담 대가로 먼저 물품이나 현금을 지원하는 구도가 아니라 북한이 취한 조치에 따라 단계별로 지원한다는 것이 핵심이었죠. 1, 2차 정상회담 때와는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싱가포르 합의’는 곧 좌초의 길을 걷는다. 싱가포르에서 합의문에 사인을 하기 직전 임 장관에게 ‘최종 결론은 내지 마라’는 정부의 훈령이 떨어지면서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임 장관은 서울의 지시에 의아해하면서도 북측 김 부장을 설득했다. ‘최종 합의는 남측의 통일부와 북측의 통일전선부 간에 하는 것이 모양새가 좋다. 다만 송환되는 국군포로 수는 다시 논의하자’는 선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임 장관이 순항할 것으로 예상했던 개성 실무회담에서 남북의 견해가 크게 갈렸다. 11월 7일과 14일 두 차례 회담이 열렸으나 결국 결렬됐고 정상회담 추진은 무산됐다. 당시 사정에 밝은 B씨의 증언이다. “싱가포르에서 최종 결론을 내기 하루 전인 10월 16일 임 장관이 서울로 와 ‘합의 내용’을 이 대통령을 비롯한 핵심 참모들에게 사전 설명하고 확인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싱가포르 합의가 뒤집어진 것은 북한이 식량난 등으로 코너에 몰려 있는 만큼 시간을 끌수록 남측에 유리하다는 강경파의 건의를 대통령이 다시 수용한 결과입니다.” 임 전 실장도 최근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확인했다. 그는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국군포로, 납북자 숫자를 10~20명으로 늘려보라’고 했다”면서 “통일부가 더 얻어내려 했으나 북측은 ‘이건 깨겠다는 뜻이구나’라고 해석해 깨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천영우 전 외교안보수석은 “5억~6억 달러어치의 물품 이외에도 엄청난 요구가 있었지만 아직 밝힐 수 없다”고 반박했다.

 MB 측은 정상회담을 추진하면서 과거처럼 북한의 페이스가 아니라 우리 페이스대로 했던 것이 성과라고 자평한다. 그러나 ‘MB정부가 이전 정부와의 차별성에 너무 집착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반론도 있다. 권만학 경희대 교수의 지적이다. “북한에 대한 압박정책은 그들이 대화에 나오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MB정부는 압박 자체에만 매달려 북한을 대화로 유도해 민족문제를 슬기롭게 풀어야 한다는 역사의식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정상회담도 어느 정도 얻을 것이 확실하면 일단 추진하고 그 다음에 다른 것을 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MB정부는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던 것 같습니다.”

안희창 통일문화연구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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