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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의 미래상을 연구하는 67년의 캠페인 -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이건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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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기본권의 제한은 염격히 해석 문제는 현실 정치의 반영도에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논한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무엇이냐에 관한 정의는 정치학자의 수효만큼이나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 법률학자의 견지에서 볼때는 헌정,다시말하면 입헌정치라는 관념을 떠나서 민주주의를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 헌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모든 나라가 다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것인가.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국가의 권력분립을 확인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근대적 헌법, 나아가서는 이상적인 헌법을 가지고 정치를하는 나라만이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현행헌법은 어떠한가. 단순히 규정상으로만 볼때에는 대체로 그것이 근대적 헌법이 아니라고 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헌법 규정이나 헌법 정신이 현실정치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느냐 하는것이 항상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규정자체에 관한 해석에 있어서도 다소 문제되는 바가 없지 않다. 특히 그 예로는 관논·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규정한 제18조,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존중, 자유와 권리의 제한을 규정한 제32조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규정들이 자유권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방향으로 해석되는 것은 결코 정통적이라고볼 수 없다.
제32조는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그것은 미국 헌법상의 소위 「적법절차」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견해도 있다. 국민의 기본권에 관한 개괄규정이라고 볼 수 있는 제32조는 특히 엄격하게 해석되지 않으면 아니되겠다는 것이 공통된 견해이다.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있다고 하지만 과연「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것인가 여부를 결경하는것도 하나의 문제이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안하기 위한 하나의 구실로서 「공공복리」를 남용하게 된다면 그 폐단은 비할수 없이 클것이다.
또 「법률로써 제한」 한다고 하는 소위 법률 유보의 경우, 그 법률은 「형식적 의미에있어서의 법률」-국회가 제정한 법률-이어야 한다는것이 헌법학상의 통설이다. 그렇다면 최고회의가 제정한 법률도「형식적 의미에 있어서의 법률」이라고 할 수있을 것인가에 관하여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를 「법률로써 제한」하는 경우, 그 법률은 어떤것이라도 다좋다는 것이아니고 충분히 그 존재 이유를 갖춘것이 아니면 아니된다는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어쨌든 법률로써 제한만하면 위법 이라고는 없지 않으냐 하는 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그 법률은 대다수국민이 시인할 수있는 존재이유를 스스로 내포하고있는 것이 아니면 아니되는것이다
「법의 지배」 없이 민주주의가 실현 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 법은 어떠한것이라도 좋다는 것이 아니고 소위 「민주적 기본질문」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것 이라야 한다는 대명제가 나오게 된다. 원래 「법의지배」라는 관념은 특히 영·미 법계에서 강조되어 온것이나, 그들이 생각하는 것도 역시 민주적 기본질서 유지라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시 한다는데 있는것같다. 민주적 기본질서라고 할 때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의미한다는 것도 강조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법률과 위임명령> 소홀히 해선 안될 「공평원리」삼권은 견제와 균형 갖춰야
「민주적」이라는 용어는 남용되기 쉽다. 공산국가에 있어서 조차 스스로 「민주적」이라는 용어를 즐겨 쓴다. 그러나 그들은 국민의 자유권을 무시한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은 대다수 국민이 시인 할 수 있는 충분한 존재이유를 스스로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면 아니 될 뿐 아니라, 그 법률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단계에 있어서도 오로지 형식에 그치지 맡고 공평의 대원리를 소홀히 해서는 아니된다는것이 강력히 주장 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앞서 근대적 의미의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 존중과 권력분립을 그 가장 큰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논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권력분립제도에 관해서 약간의 고찰을 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권력 분립제도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입법·행정·사법의 3부가 각자 독립적인 기능읕 수행하면서 상호간에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체크·앤드·밸런스」가 이것이다. 그러나 고전적 의미에 있어서의「체크·앤드·밸런스」는 제도적으로도 이미 약화되어 거의 그 의의가 없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다만 과도하게 일부가 타부의 권한을 침범할때는 위험한 결과가 발생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위험한 결과가 발생되는 특히 뚜렷한 경우는 행정부가 입법부·사법부의 권한을 침범할 때라고 할 수 있다. 행정부가 스스로 적극적으로 타부의 권한을 침범할 때는 더 말할 것 도없고 입법부·사법부가 스스로 자기 제한을 하여 그 권한외 중요한 부분읕 행정부에 위임해버리는 경우에도 역시 위험한 결과가 발생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 관해서는 몇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그 중요한 것 중에는 이른바 위임명령이 있다. 위임명명이라고 하는 것은 국회가 법률을 제정 할 때 그 내용의 이 부분을 명령의 형식-예를 들면 대통령령-으로 정할 것을 규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위임명령이 정도를 지나치게되면 입법부는 사실상 거의 허수아비가 되고 말 가능성이 있다. 국회를 통과한 법률에는 다만 몇 가지 조문만을 규정해놓고 자세한 것은 모두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고 해버리면 실질적으로는 국회가 입법에 관한 자기의 권한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된다. 상세한 내용은 이것읕 대부분 명령의 형식으로 정하도록 규정한 법률을 소위 해골조항(Skelet on Clause)이라고 비웃기도 한다. 국회를 통과한 법률은 사실상 내용이 없는 뼈만 앙상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렇게되면 행정부는 입법의 기능까지도 겸하게 된다는 반갑지 않은 결과가 된다.
입법부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권한으로는 입법 기능이외에 국정감사가 있다. 국회가 가지고 있는 이 국정감사 기능은 원래 행정부를 견제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도 그리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국회는 으례 여당이 이를 좌우하게 마련이다. 행정부와 친근한 관계에 있는 여당의원들은 엄정한 태도로 국정감사에 임하는 대신 야당의원들의 국정감사 활동에 장애가 되는 일을 하는 수 조차 있다. 이러한 사정 하에서 공정한 국정감사가 기대 될 수 있을 것인가는 크게 의문시된다.
사법부도 행정부에 의하여 그 권한의 일부를 침식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예로서 소원 제도릍 들 수 있다. 행정청의 위법 또는 부당한 처분으로 말미암아 권리 또는 이익을 침해당한 사람은 다른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것을 제외하곤 소원을 제기해 가지고 그 취소 또는 변경을 청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 시비의 판정을 내리는 것은 소위 「아결행정청」이다. 법원이 아닌것이다. 모든 권리·의무에 관한 공사는 법원의 재판에 의하여 이것이 처리되어야 할 터인데 행정부자체가 행정 관청을 상대로 하는 쟁송을 처리한다는 것은 붙합리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불복하는 경우에는 고등법원에 행정 소송을 제기 할 수도 있을것이나 그것으로써 만족스러운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역시 국민의 권리와 사법부의 권한이 어느 정도 손상되는것이라고 하는 결론을 면할 수 없는것이다.
소원이의에도 많은 행정심판제도가 있다. 이것들은 다 이해 관계있는 일반국민의 권리는 물론이고 사법부의 권한을 침식하는 현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침해되는 사법권> 행정상의 편의에 희생 안되고 검사는 공정과 독립성 지녀야
사법부의 권한은 어땐 행정상의. 편의를 이유로 해서 침식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뿐만아니라 사법부는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헌법 제98조가 규정하고있는 바와 같이 완전한 독립을 유지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법관은 이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것이 그 규정이다. 대체로 우리나라 법원은 이와같은 헌법의 정신에 따라 공정한 직무 수행을 하고있다고 할 수 있으나 아직도 세간에서는 재판이라는것이「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비판도 있음을 생각 할 때 우리는 아직도 많은 것을 사법부에 기대하지 않 을 수 없는 것이다. 법원의 독립에 관하여 논하면서 우리가 주의를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은 검찰의 위치에 관해서 이다. 검사가 원래 사법부에 속하는것이 아니고 행정부에 속하는 공무원 이라는 것은 더 맡 할 것도 없다.
그러나 검사는 범죄를 수사하고, 공소를 제기하고. 그 공소를 유지하기 위하여 재판에 관여하게 되기 때문에 직무 수행상 공정성과 독립성을 상실치 않을것이 요구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검찰의 실태는 어떠한가. 검찰기법 제14조에 의하면 『법무부장관은 검찰사무의 최고감독자로서 일반적으로 검사를 지휘 감독한다.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 감독한다』고 규정하고있다.
이와 갈은 사정하에서는 검사가 그 직무수행을 함에 있어 어느정도 정치적인 영향을 받을가능성이 있지않은가 하는데 의문이 제기된다. 어찌되었든간에 검사는 언제나 공정성과 독립성을 상실치 않도톡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인신을 구속하고, 공소를 제기 할때에는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구속에 대해서는 구속적부심사제도가 있고, 검사가 부당하게 공소제기를 하지않는 경우를 위해서는 재정신청 제도가 있기는하나 이것만을 가지고는 검사가 행사하는 막강의 권력을 제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검사자선이 외부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반음이없이 양심에따라 직무를 수행 할 것이 가장 요구되는 바라고 하지않을 수 없다.

<정치목적과 법 지배> 일치된 견해...법관의 우위론 형사보상은 충분히 연구해야
억울하게 구속, 기소되었다가 드디어 무죄가 된 사람을 위하여는 물론 법률이 정하는바에따라 형사보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그 액수라는 것은 너무나 소액일뿐아니라 설사 그것이 상당한 액수라 할지라도 만족할만한 「보상」이 된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도 충분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 이라는것이 공통된 견해이다.
검사와 법관의 관계에 관해서는 어떠한 의미에서도 법관이 검사보다 우윌해야 하겠다는것이 일치된 견해이다. 임명상의 자격은 물론이고 실지의 학문상, 인격상 자질등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않다면 법관이 자칫하면 검사의 압력에 의하여 직무수행상 공정성읕 상실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행정권 강화의 한계> 위임입법 재검토해야할 단계 행정부 재량권 제한도 고려를
행정권의 강화라는 것은 최근 세계적인 현상으로 되어있다. 이와 관련해서 「법의 지배」 라는 관념이 어떻게 보면 위기에 놓여있는것 갈기도 하다. 그렇기는 하나 적어도 민주주의를 확보하려면 법치주의의 근본정신을 이탈한다는 것은 용허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법의 지배」원칙에 위반된다고 생각되는 사실로서는 여러가지를 매거 할 수있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것으로 네가지가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행정부의 위법 또는 부당한 행위로 말미암아 피해를 본 사람에대한 구제가 불충분하다는것이다. 그 예로서 도시계획을 감행함에있어 최근 실시되고있는 토지수용 등을 들수 있다.
둘째로, 광범한 위임입법에 재검토가 가해져야 하겠다는 것이다. 불가피한 경우에만 위임입법을 인정하고 위임의 범위도 명확을 기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개괄적인 위임으로 행정부가 지나친 명령입법을 감행하는 경우에는 자칫하면 국민의 권리가 크게 훼손 될 가능성이 있다.
세째로, 군정시대에. 최고회의가 제정한 법령들에 대하여 재검토가 가해져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것이다·
네째로, 행정부는 그 직무 수행에 있어 언제나 좀 더 평등 원리를 강조해야 되겠다는 것이다. 행정부가 위법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현저하게 편파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소수의 사람이 특히 혜택을 받게하는 등사가 있다면 이것은 반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행정부의 재량권을 어느 정도 법으로 제한하는 조처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주권자의 권리와 의무> 올바른 인식과 자존심을 갖고 국민 된 입장서 실력기르도록
일반국민들의 준법은 정부나 법완이 이를 강제 할 수 있다. 그러면 정부나 법원이나 국회의 준법은 누가 강제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중대한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결국 하나밖에 없다.
즉, 국민의 여론에 의존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의 정당한 여론이 효과적으로 반영되려면 역시 국민전체가 지적 경제적으로 실력을 향상시키지 않으면 아니되겠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국의 지성인은 저항력이 없다는 비평도 있으나 그것은 그리 중요한것이 아니다. 요망되는것은 전국민이 건전한 판단을 가지고 권리와 의무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끝으로 정치목적을 위해서는 「법의 지배」도 회생 될 수 있을것인가 하는것읕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경우에는 그정치 목적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도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역시 「법의 지배」를 희생 시킬 수는 없다는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법률학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으로서는 「법의 지배」는 민주주의의 「알파」이며 「오메가」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것이다. 민주주의나 「법의 지배」는 이미 달성된 것이 아니고 모든 국민들이 그 실현읕 위하여 노력하지않으면 아니될 하나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국민들은 주권자로서의 자존심을 가지고 이 이상을 향하여 협력해야 할것이다.

<법률 문제「심포지엄」> 1967년 1월 21일 본사 회의실
사회 이건호(성대·법정대 교수) 김기두(서울대·법대교수) 윤세창(고대·법대교수) 황산덕(성대··법정대 교수) 한동섭(고대·법대교수) <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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