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귀식의 시장 헤집기] 키프로스의 줄타기 생존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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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호 33면

사건의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곁가지가 사라지며 뼈대만 선명해진다. 단속적인 사건들이 하나로 연결된다. 노년의 회고록이 미화되고 때론 극적인 까닭이다. 미국 재무장관을 지낸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는 사람들이 파멸을 일시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일이라고 기억하지만 실제로는 위기와 위기 사이, 파멸과 파멸 사이에 진정기가 끼어 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와 98년 러시아 디폴트까지 8개월, 2008년 봄의 베어스턴스의 파탄에서 리먼브러더스의 붕괴까지는 반년의 간격이 있었다.

유럽의 위기라고 다를까. 유럽의 경제상황은 6개월이나 1년 전 어느 시기보다 덜 걱정스럽다고들 한다. 지뢰들이 하나 둘 제거돼 이제 통제 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이도 있다. 하지만 최근 다시 불거진 키프로스의 디폴트 위기는 유럽이 여전히 일촉즉발의 국면에 놓여 있음을 일깨워 줬다.

터키 턱밑의 지중해 섬인 키프로스. 지정학적으로는 한반도보다 한층 복잡하다. 강대국과 주변국의 이해가 교차하는 땅이다. 키프로스의 남북 분단도 고약한 지정학의 산물이다. 이번 금융위기 역시 키프로스의 지정학만큼 복잡하게 꼬여 있다.

무엇보다 키프로스가 이런 위기에 몰린 것은 형제국 그리스가 돈을 떼먹어서다. 금융 부문이 비대해지고 돈세탁 등으로 신뢰를 잃은 탓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코너에 몰린 키프로스에 유로랜드가 돈을 대기로 했는데, 그 조건이 깜짝 카드다. 은행 예금에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라는 요구다. 구제 혜택을 누리는 예금자도 비용을 분담하고, 정부는 그 세금으로 정상화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이너스 금리를 사실상 강요하는 것이자 보장 예금의 원금마저 떼일 수 있다는 점에서 금융의 신뢰를 흔드는 카드다. 이걸 주도한 나라는 경제대국 독일이다. 키프로스에 자국인의 예금이 많은 러시아는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총리가 유럽연합(EU)을 겨냥해 ‘도자기 가게 안에서 날뛰는 황소(bull in a china shop)’ 같다고 독설을 퍼부은 이유다.

돈 싸움 뒤에선 에너지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 키프로스는 바다에 묻혀 있는 천연가스를 내세워 돈을 빌리려 했다. 가스전은 러시아가 가장 탐낸다. 유럽의 에너지 안전을 위협할 카드를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스전이 서방에 넘어가면 유럽은 변덕스러운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 인접국 터키 역시 키프로스가 가스를 독차지하는 걸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태세다.

국제정치적 역학도 작동하고 있다. 서방은 키프로스를 이라크·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 병참허브로 활용했다. 키프로스가 유로랜드에서 탈퇴라도 한다면 영국이 이 나라에 둔 군기지의 운명을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시리아의 친러시아 정권이 힘을 잃으면 러시아에는 새 지중해 거점이 필요할 수 있다. 키프로스가 시리아의 대안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유로랜드에서 인구 100만 명 정도의 키프로스는 경제 비중이 콩알만 하다. 하지만 지정학과 결합하면 그 폭발력이 무시 못할 수준으로 커진다. 게다가 키프로스는 자원과 지정학을 활용하고 있다. 비틀거리면서도 줄타기를 구사할 줄 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과 흡사한 지정학에서 키프로스가 구사하는 생존전법, 우리에게는 경제적 파급을 따져 보는 것 이상으로 살펴봐야 할 구석이다. 키프로스 시위대의 구호다. “그들이 우리를 꿈꾸지 못하게 하면 우리는 그들을 못 자게 하겠다(If they don’t let us dream, we won’t let them sl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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