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어요 … 행복하세요 국보센터 서장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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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훈·싸이 15년 우정 서장훈(오른쪽)과 친한 싸이가 꽃다발을 건네고 있다. [부산=임현동 기자]

서장훈(39·KT·2m7㎝)이 떠났다.

 19일 부산 사직체육관에서 열린 KCC와 정규리그 최종전은 서장훈의 마지막 경기였다. 한국 농구는 ‘국보 센터’를 떠나보냈다.

 서장훈은 선배 세대 센터와는 완전히 다른 ‘괴물’이었다. 당시로는 압도적인 신장에다 균형 잡힌 체격을 자랑했다. 골밑슛뿐만 아니라 미들슛, 심지어 3점슛도 쏘았다. 한국 농구의 센터는 서장훈 이전과 이후로 정확히 나뉜다.

 연세대는 1994년 실업 강호들을 제압하며 농구대잔치 정상에 올랐다. 1학년 서장훈이 주역이었다. 서장훈은 MVP에 오르며 그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렸다. 그리고 무수한 전설을 써내려갔다. 프로에서는 15시즌 동안 6개 팀을 거치며 두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그가 세운 프로통산 최다 득점과 최다 리바운드 기록은 한참 동안 깨지지 않을 것이다.

 서장훈에겐 안티팬도 많다. 코트에서 찌푸린 표정으로 심판에게 항의하는 모습이 ‘비호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서장훈은 반박한다. “최고의 팬 서비스는 지고 있어도 실실 웃는 게 아니라 치열하게 경기하는 것이다.”

 지난해 이혼으로 바닥까지 떨어진 서장훈은 오롯이 코트를 지켰다. 멋진 마무리를 위해 그는 지난해 1년만 더 뛰겠다고 선언했다. 서장훈 본인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국보 센터’의 농구 인생을 되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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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포수를 보면서 서장훈의 공을 받았다.”(이도형·전 야구선수)

 서장훈은 원래 야구 선수였다. 학동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 유니폼을 입었다. 서장훈과 함께 야구를 했던 친구가 전 한화 이글스 포수 이도형(38)이다. 서장훈이 투수, 이도형이 포수였다.

 야구부가 있는 선린중으로 간 서장훈은 3개월 만에 친구들이 있는 휘문중으로 돌아왔다. 이때 농구로 종목을 바꿨다. 중1 때만 해도 1m70㎝였던 서장훈은 중3 때 1m97㎝까지 자랐다. 그러고는 휘문중을 4개 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괴물이 나타났다”며 농구계가 흥분했다.

◆“TV에서만 봤던 선배들과 함께 코트에서 뛰었다. 참 행복했던 시절이었다.”(서장훈)

 서장훈이 뛴 3년간 휘문고는 10개의 전국대회를 휩쓸었다. 서장훈은 청소년대표 시절 친해진 이상민(41·삼성 코치)과 함께 뛰고 싶어 연세대에 진학했다. 서장훈의 가세로 문경은(42·SK 감독)·이상민·우지원(40·농구 해설위원)·김훈(40)과 더불어 ‘독수리 5형제’가 완성됐다. 1993~94시즌 연세대는 농구대잔치 플레이오프에서 최강 기아자동차를 꺾은 데 이어 결승전에서 상무를 누르고 우승했다.

◆“선수 생활 중 유일하게 울었던 때다. 숙제를 속 시원히 해결한 느낌이었다.”(서장훈)

 서장훈이 꼽은 ‘최고의 경기’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결승전이다. 중국을 깨고 금메달을 땄다. 서장훈은 결승전에서 자신보다 22㎝나 큰 야오밍을 마크했다. 이 경기에서 서장훈은 15점·6리바운드로 연장 명승부의 발판을 놨다. 야오밍도 23점을 넣었지만 서장훈이 없었다면 그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결승전이 열린 부산 사직체육관, 11년 뒤 그곳에서 서장훈은 은퇴 경기를 치렀다.

◆“깨끗하게 잊고 싶은 한 해였다.”(서장훈)

 2012년. 서장훈이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해다. 소속팀 LG는 7위로 처져 6강 플레이오프에 오르지 못했다. 오정연(30) 아나운서와 3년 만에 파경을 맞아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불명예 속에 농구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서장훈은 올 시즌 부상 투혼이 뭔지 보여줬다. 얼굴에만 총 70바늘을 꿰매는 부상을 당했다. 지난해 10월 26일 SK와 경기에서 눈 주위를 다쳐 50바늘, 11월 21일 KGC인삼공사전에서 입술이 터져 20바늘을 꿰맸다. 서장훈의 투혼에 안티팬들의 마음도 돌아섰다. 이제 누구도 그를 ‘골리앗’ ‘비호감’이라 부르지 않는다.

글=오명철 기자
사진=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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