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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935년>

<아, 그를 만났으면>
3월11일 지금의 나의 절실한 소원은 지독한 병에 걸려 적어도 8일간은 그의 일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것.
왜 아무 일도 일어나 주지 않는 것일까? 도대체 나는 어째서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아, 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
절망! 나는 수면제를 사려고 한다. 약이 나를 미치게 하여 그 이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게 되겠지.
그 이가 구하는 것은 나의 육체뿐이다. 달리 생각할 도리가 없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그때만의 얘기다. 약속도 마찬가지다. 그때뿐이지 결코 지켜진 적이 없다.

<그는 베를린으로>
3월16일 그는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그를 늘 만날 수 없다는 것만으로 하여, 어째서 이렇게도 간단히 마음이 헝클어져 버리는 것일까.

<침묵의 「데이트>
4월1일 그는 어제 나를 저녁에 「사계」식당으로 초대했다. 나는 그의 이웃에 앉아야 했으나 3시간 동안 그이와 한 마디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작별의 인사를 하자, 그는-전에도 한번 그랬듯이-돈이 든 봉투를 나의 수중에 쑤셔 넣었다. 조그만 사연의 편지라도 끼어 넣어 주었다면, 이 선물은 나를 더욱 행복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어쩐 영문인지 그는 「호프만」씨의 저녁 초대는 피한다. 거기서면 적어도 2, 3분간은 그이가 나의 것이 될 수 있는데. 그의 「아파트」가 완성되지 않는 한 내가 멀어져 있는 것만이 그의 소원일 것이다.

<나는 불행 덩어리>
4월29일 나는 슬프다. 어느 모로 보아도 불행의 덩어리. 「아파트」는 되었지만 거기로 그를 방문하는 것은 싫다는군.
사랑은 그이의 계획엔 들어 있지 않은 모양이다.

<필사적으로 저금>
나는 필사적으로 저금을 하고 있으나, 뭐든지-양복에서 「카메라」, 게다가 연극관람권까지-팔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비위를 건드리고 있다. 이제 곧 좋아지겠지. 나의 빚은 그렇게까지는 크지 않으니까.

<새 연인이 생기다>
5월10일 나의 처지를 염려해 주는 「호프만」부인으로부터 그이가 「나를 대신할 여자」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여자는 「발큐레」라고 부르는데 그야말로 그녀의 모습과 꼭 어울리는 그 다리라니! 그이가 그 뚱뚱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녀가 그에게 열중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이라면 불행한 때에 체중이 붓는 「찰리」정도로 재주가 없는 한, 곧 말라버릴 것이다.
결국 나는 그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독일과 전 세계로 통하여 가장 위대한 남자의 애인인 나는 고요히 태양을 쳐다본다. 그이에게 당당히 나를 사람들 앞에 내어놓을 용기가 없다니.

<최후의 편지를…>
5월24일 이제 막 나는 결단을 촉구하는 편지를 부쳤다.
그이는 이것을 중대한 것으로 생각해줄까?
밤10시안으로 회답을 얻을 수 없으면 그만 25정의 약을 먹고 조용히 잠들면 되는 것이다.
석달 동안 그이로부터 소식이 없었다. 도대체 이것이 그가 고백한 열렬한 사랑이란 것일까?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의 이러한 태도의 뒤에는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또 하나의 여성이 있는 모양이다. 「발큐레」외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일이다. 그러나 여성 외에 무슨 이유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내일은 늦으리…>
5월28일 하나님, 그이가 오늘도 회답을 주지 않는다면 어쩔까? 아, 누구도 좀 살려주셔요! 이런 불안에 견뎌야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낫겠다. 하나님, 살려주셔요. 오늘 중으로 그이와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셔요. 내일은 늦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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