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2002] 개그맨 박성호

중앙일보

입력

# 딴지걸기 하나-"정부는 'FM 대행진'을 느긋하게 들을 수 있도록 출근 시간을 10시로 늦춰달라! 늦춰달라!"

매일 아침 8시 정각. 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오프닝 송 말미에 들려오는 운동권 학생의 처절한 구호가 출근 중인 직장인들의 마음을 흔든다. 정부가 출근 시간을 10시로 늦춰줄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자 최근엔 "그게 어렵다면 9시 반이라도 괜찮다! 괜찮다!"로 꼬리를 내리긴 했지만….

# 딴지걸기 둘-"선생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대관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굽쇼□ "

선생님이 속담 한마디를 말하자 그는 울분을 토하며 외친다. "그렇다면 전국의 솥뚜껑 고기집은 모두 공포의 도가니란 말씀이십니까." 다시 외친다. "정부는 전국의 솥뚜껑집에 안전한 프라이팬을 제공하라."

과거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익숙한 세대라면 한번쯤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이 '운동권 말투'의 주인공은 개그맨 박성호(29) 씨. 그는 KBS 개그콘서트의 '봉숭아 학당'에서 운동권 학생으로 나와 30~40대에겐 지난날의 향수를, 20대에겐 엉뚱한 선배 대학생의 모습을 던지고 있다. 정부에 대해 매주 얼토당토 않은 요구를 하고 있지만 그 효과는□ 그냥 웃음뿐이다.

"대학 때 학내 분규를 겪으면서 운동권 학생의 말투를 유심히 관찰했죠. 제가 흉내낼 때마다 친구들이 배꼽을 잡으며 웃더라고요. 그걸 패러디해봤죠." 한편으론 운동권을 희화화한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10대보다 성인층 팬이 많을 정도로 호응도 높다.

사실 그는 '중고 신인'이다. 1997년 KBS 개그맨으로 입문했지만 TV엔 쉽게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2년 전 무명 신인들이 모여 의욕적으로 시작한 '개그 콘서트'는 끼를 발휘할 좋은 기회였다. 그는 요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방송국 내 음반자료실을 찾을 정도로 자료수집에도 열심이다.

팝송 가사를 한국말로 재해석한 '뮤직토크'가 은근히 인기를 끌면서 부담도 커졌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2백~3백곡씩 노래를 들으며 찾아낸 가사가 그의 손때 묻은 노트에 1천여개나 축적돼 있다.

최근엔 '만담 개그' 연구에 빠져 있다. 얼마전 청계천을 뒤져 찾아낸 백남봉씨의 육성 만담 개그 테이프가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백남봉.이주일 선배처럼 말 하나로도 울고 웃기는 '국민 개그맨'이 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서두르지 않고 달려왔듯 앞으로도 꾸준히 제 스타일을 밀고 나갈 작정입니다."

그는 주말이면 목동 스케이트장을 찾아 아이스하키 선수로 변신한다. "운동을 하면 순발력이 생기고, 순발력이 좋아지면 개그의 질도 높아진다"는 이유에서다. '운동신경과 개그의 상관 관계'를 진지하게 설명하는 그는 조금씩 프로의 세계를 향해 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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