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펌 대신 무료 법률상담 6년 전 약속 지킨 이강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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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이강국 전 헌법재판소장이 12일 서울 서초동 대한법률구조공단 상담실에서 무료 법률 상담을 해주고 있다.

“제가 무엇을 도와 드리면 될까요.”

 12일 서울 서초동 대한법률구조공단 상담실. 오전 11시에 예약한 조모(41)씨가 상담실에 들어서자 이강국(68) 전 헌법재판소장이 미소를 지으며 맞았다. 높은 법대 위에서 근엄한 모습으로 판결을 내리던 헌재소장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이웃의 고충을 들어주는 마음씨 좋은 동네 어르신 같은 분위기였다.

 조씨가 아파트 집주인의 파산신청으로 전세금 8500만원을 날리게 됐다는 사연을 털어놓자 이 전 소장은 “아이구” “거 참” 등 짧은 탄식을 연발하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사연을 듣는 틈틈이 연필로 메모하던 그는 “정말 난감하게 되셨다”며 조씨를 먼저 위로했다. 조씨는 “집주인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산 아파트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이 전 소장은 “법률적으로는 소송을 제기하면 돈을 주라는 판결을 받을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집주인이 파산했기 때문에 돈 받을 길이 없다”며 “아파트가 경매로 넘어간 후 유찰로 가격이 떨어지면 그때 아예 인수하는 방법을 고려해 보라”고 조언했다.

 지난 1월 21일 퇴임한 이 전 소장이 대한법률구조공단에서 무료 법률상담 자원봉사에 나섰다. 6년여 전 헌재소장 인사청문회 당시 퇴임 후 계획을 묻는 청문위원의 질문에 무료법률상담으로 사회에 공헌하겠다고 한 약속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상담을 마친 후 본지 기자를 만난 이 전 소장은 “법률적 판단만 했던 재판관 시절과 달리 현실적 대처방안을 함께 제시하는 ‘생활상담’을 해야 해 어려웠다”며 “속 시원한 해법을 내놓으면 좋겠지만 만만치 않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서류로만 접하던 국민의 생생한 어려움을 처음으로 직접 듣게 돼 보람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퇴임 후 로펌에 가지 않고 아내의 편의점에서 일하는 김능환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과 자신의 사례 등으로 법조계 원로들의 퇴임 후 새로운 행보가 점차 확산되길 바라는 마음도 내비쳤다. 그는 “앞으로 권력 있고 돈 있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며 “대학교 강의와 상담봉사 외에 로펌이나 공직에 갈 계획은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다만 “한가지 희망이 있다면 대한민국이 통일되고 통일헌법이 만들어진다면 그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고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이 전 소장은 앞으로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두 시간씩 무료법률상담을 할 계획이다. 이날은 교통사고 합의금과 관련해 상담을 받은 홍모씨 사건 등 3건을 상담했다. 홍씨는 상담을 마친 후 “경륜 있는 분이 가려운 곳을 쏙쏙 긁어주는 상담을 해준 덕분에 고민거리가 해결됐다”며 감사의 뜻을 밝혔다.

글·사진=박민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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