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헴펠」의 법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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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역사학자가 잘 인용하는 것 가운데 「헴펠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역사를 어느 정도 과학적으로 체계화할 수 있느냐 하는 논쟁은 상당히 오래 끌어왔었지만, 1942년 미국의 「C·G·헴펠」 교수가 『역사에 있어서의 일반법칙의 역할』이란 논문을 통해 대체로 과학적이라 할 역사기술법칙을 창안해 내었다. 말하자면 역사에 있어서는 풍선이 폭발하는 경우처럼 누군가가 풍선 곁에서 성냥불을 그었다는 하나의 동기(이것을 「초조건」이라 했다)와 수소는 인화하면 폭발한다는 원리(역시 「법칙」이라고 불렀다)가 결합했을 때 이루어진다는 법칙이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이처럼 초조건과 법칙이 어울렸을 때 꼭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이루어진다고 단정할 수 있느냐 하여 다시 「도나건」 교수가 법칙이라 하지 말고 「준법칙」이란 말로 통하게 하자 하여 『역사에는 여러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데까지 후퇴하였다.
지난 몇 달 동안을 돌아볼 때 우리 주변에서는 엄청날이 만큼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일어났었다. 「저널리즘」이 「아스팍」은 말할 것 없고 「마닐라」회담, 그리고 「존슨」 방한의 환영인파에까지 「역사적」이란 관형사를 꼭 잊지 않고 달았다. 우리의 볼을 스치지 않은 사건에서부터 손목으로 꽉 죄어볼 수 있었던 지난 동안의 일련의 사실들을 모두 「역사」라는 한마디로 수록한다는 것에는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역사」가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한 일도 드물었다.
그러나 우리의 국회만은 이런 「역사」에 아직도 둔감한 듯 하다. 물론 국회마저 들뜨라는 요구는 아니나, 모두를 들뜨게 한 사실들에 국회가 차분하게 정서하는 손을 뻗쳐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서다. 국정감사가 일단 끝나고 국회가 재개되자 튀어나온 말이 또 여·야간에 무슨 논쟁, 무슨 사건 하여 파란이 일 것이라는 것.
「사건」이 있었고 국회가 재개되면 반드시 격돌이 빚어진다는 하나의 건조한 법칙. 「마닐라」회담에서 우리 나라가 『한쪽에 성서를, 그리고 다른 쪽에 칼을-』하고 천명하면서 내디딘 우리의 국제적 「거보」를 외무위원회에서나마 조용히, 우리국회에 적용되는 「헴펠의 법칙」을 벗어나서 정리해보는 것이 정말 「새 아세아」에 임하는 「새 한국」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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