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문화인들이 댐공사 참견한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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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민태원의 '청춘예찬', 황순원의 '소나기'…. 장년 세대들이 중 고교 시절 국어시간에 만났던 대표적 명문(名文) 들이다. 지금껏 기억하고 있을 그런 글들을 요즘 아이들도 읽고있다.

아니 그 못지않은 문장들, 그것도 새로운 글들을 만나고 있다. 이를테면 앞으로 중2년생들은 국어시간에 김용택의 장시(長詩) '그 여자네 집'을 배우게 된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그 작품을 짐짓 한갓진 마음으로 되읽어볼 참이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불빛이, 따듯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살아있는 집". 그 은행나무 집에 '그 여자'가 산다.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손길이 따듯해져 오는 집"에 사는 고향 여자, 마음 속의 그녀다.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한 묘사는 넷째 연을 읽어야 한다. 눈오는 날, 그가 마침 마당을 건너갈 무렵이다.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어내는" 모습에 대한 묘사를 만날 무렵 사람들은 무릎을 칠 수 밖에 없다. 더욱이 그는 내숭을 떨지도 않는다.

모내기철 새참을 이고 가던 그 여자와 논두렁에서 눈길이 딱 마주쳤을 무렵의 얘기를 들어보자.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나를 쳐다보며 반가움 하나도 감추지 않고/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환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런 여자다.

열아홉에 시집 갔던 그 여자에 대한 이 회상시는 소설가 박완서의 단편 '그 여자네 집'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이 시에서 모티브를 얻어 박완서가 같은 제목의 소설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창작과 비평사 『너무도 쓸쓸한 당신』 재수록)

시 속의 창조물인 그녀의 고향은 필시 섬진강변의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일 게다. 김용택의 고향이자, 그가 이 시를 집필했던 창작의 공간이니까.

앞뒤 사정을 알려면 그의 산문집 『섬진강 이야기』(열림원, 1999) 를 읽으면 된다. 거기엔 요즘 유명해진 꼬마학교인 마암분교 얘기도 나온다. 문제는 교과서에 '그 여자네 집'을 집어넣기로 한 어른들이 굳이 생뚱맞은 일을 꾸미고 있다.

진메마을을 포함해 지리산을 끼고 도는 5백리 남도(南道) 의 젖줄을 막아놓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게 논란 속의 적성댐 건설안이다.

이 경우 덕치면 수몰은 불가피하다. 사회문화적 가치가 풍부한 현장을 개발논리로 마구 밀어붙여도 좋은지는 도시 모를 일이지만, 이곳은 영화 '아름다운 시절' '춘향뎐' '남부군'의 촬영무대이기도 하다.

TV드라마 '허준'의 일부도 찍었다. 더욱이 댐은 환경적 재앙이기도 하다. 섬진강 허파를 잘라내는 효과 때문이다. 5대강 중 가장 맑은 섬진강이 낙동강.영산강꼴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최근 문화인 1백여명이 댐건설 백지화 요구 성명서를 발표한 것도 그 때문이다. 김용택도 지난 연말 상경해 국회 앞 1인시위를 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 여자네 집'의 무대라고 가르칠 그 공간을 수몰시킬 용기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예정돼 있다는 공청회 등을 통해 좋은 결론을 얻길 기대한다.

조우석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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