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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움직이는 유대인의 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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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워싱턴 컨벤션센터 안은 ‘키파(유대인이 쓰는 작고 테두리가 없는 모자)’ 경연장이었다. 세미나장마다 청중으로 넘쳤다. 해마다 이맘때면 전국에서 몰려든 이스라엘계 미국인들이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점령한다. 유료 회원 10만 명의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 연례총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세계를 움직이는 게 미국이라면 미국을 움직이는 건 유대계 미국인이란 말이 있다.

 3일(현지시간) AIPAC 총회가 열린 워싱턴 컨벤션센터에서 그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후 3시30분 206호에선 ‘경제적 제재가 이란의 핵 개발을 막을 수 있을까’란 주제의 세미나가 열렸다. 주제 발표자 중엔 ‘저승사자’란 별명의 대니얼 글레이저 재무부 테러금융·금융범죄 담당 차관보도 있었다. 글레이저 차관보는 2005년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계좌를 동결시켜 김정일의 돈줄을 꽁꽁 묶었던 장본인이다. 글레이저는 “미국의 금융제재로 이란 원유 수출이 75% 감소했다”며 “핵을 막는 건 동맹국들의 단합된 제재”라고 강조했다.

 미국 대선을 앞둔 지난해 3월 AIPAC 연례총회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공화당 경선 후보들이 참석했다. 이스라엘에선 시몬 페레스 대통령,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도 참석했다. 반면 올해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대신 조 바이든 부통령이 4일 기조연설을 한다. 네타냐후 총리는 영상 메시지만 보냈다. 외형상 지난해보다 덜 화려하다.

 하지만 올해로 12년째 AIPAC 총회에 참석하고 있는 김동석 재미시민참여센터 상임이사는 “겉만 보고 한 판단”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이날 열린 오리엔테이션 때 주최 측은 “중동의 봄 이후 미국 중동정책의 우선순위에서 이스라엘이 소외되고 있다”며 “지금이 위기”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런 만큼 2013년 AIPAC 총회는 훨씬 세밀하고 조직적으로 치러지고 있다.

 3일과 4일 이틀간 컨벤션센터 분임토의실에선 중동, 이란, 미·이스라엘 관계 등 6개 주제별로 210여 개의 크고 작은 세미나가 열린다. ‘내가 미국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이스라엘 문제를 다룰까’란 주제도 있다. 총회 참석자도 지난해 1만2000명에서 올해 1만5000명으로 늘었다.

 AIPAC의 힘은 조직과 자금력에서 나온다. 연간 10만 달러(약 1억1000만원) 이상 내는 회원이 300명에 달한다. 김 상임이사는 “정치인을 찾아다니며 로비하는 게 아니라 돈과 표가 필요한 정치인으로 하여금 찾아오게 만든다”고 말했다.

  컨벤션센터 지하 1층에는 무료 유언장 작성을 돕는 ‘유언(will) 상담코너’가 마련돼 있었다.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회원은 재산 중 일부를 AIPAC에 기부한다는 유언장을 쓴다. 전체 미국 인구의 2.5%인 650만 명에 불과한 이스라엘계 미국인의 행사에 해마다 대통령 또는 부통령, 연방 의원들이 출동하는 이유다. 올해도 에릭 캔터 공화당 원내대표, 스탠리 호이어 민주당 원내총무, 로버트 메넨데스 상원 외교위원장,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박승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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