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주의자 담징에게서 오늘을 봤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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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민환

언론학자 김민환(68) 고려대 명예교수가 최근 소설 『담징』(서정시학·사진)을 냈다. 일본 법륭사(法隆寺) 금당벽화를 그린 고구려 승려화가 담징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이다. 김 교수는 2010년 학계 은퇴 후 전남 보길도에 내려가 ‘남은재(南垠齋)’라는 집을 짓고 홀로 집필 활동에 전념해왔다. 현재 중앙일보 자문위원과 다산연구소 대표다.

 소설 『담징』에서 담징은 오경(五經)과 불교 경전에 해박하고 음악에도 능했던 ‘문예인’으로 그려진다. 사가(私家)의 여인을 향한 애욕으로 깊은 고뇌에 빠진 스님의 인간적인 면모도 흥미롭다. 개화기 대중매체 발달사를 연구하던 중 문자와 종이의 생성과정에 궁금증을 갖게 된 김 교수는 담징이 610년 일본에 종이와 채색화를 보급했다는 기록에서 힌트를 얻어 소설을 쓰게 됐다.

 “교과서에도 수록된 정한숙의 『금당벽화』가 담징을 민족주의자로 그렸다면, 전 그를 국가라는 울타리에 얽매이지 않았던 코스모폴리탄으로 해석했습니다. 금당벽화 속 미륵불이 대표하는 부드럽고 기품 있는 포용력이 오늘날 한·일관계나 진영논리에 얽매인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소설 집필은 오랜 ‘문청(文靑)’의 꿈을 이룬 것이다. “지난해 역사소설 『하멜』을 낸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가 제 롤모델입니다. 저도 언론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기자로 일선에서 뛰다가 전문 분야를 살려 대기자가 된 후 만년엔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책 말미에 수록된 『일본 서기』 등 일본사, 삼국시대사, 불교서적, 중국 사상과 문화, 미술과 벽화, 음악 등의 참고문헌에서 만만치 않은 준비 과정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불교서적만 100여 권을 참고했다. “소설도 논문과 비슷해 근거 없이 상상력만으론 쓸 수 없죠. 역사가 사실과 사실이 만난 허구라고 한다면, 소설은 허구와 허구가 높은 개연성으로 연결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쓰게 된 데는 1990년대 초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과정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나 오랜 친분을 나눠온 임권택(77)감독의 역할이 컸다. “워낙 그 분의 인품과 예술세계를 존경하는 터라 언젠가는 내가 시나리오를 써서 함께 영화를 만들어 보리라는 꿈이 있었습니다. 몇 년 전 제가 담징 얘기를 쓰고 싶다고 했더니 ‘A4 용지 두어 장 정도로 시놉시스(요약본)를 만들어보라’고 해 시작하게 된 것이 결국 소설이 됐습니다.”

 집필할 때 가장 애를 먹었던 건 담징 스님과 속세 여인과의 관계 묘사였다. “제 딴엔 상징적이고 은유적으로 한다고 산 속 정사 장면을 개울물이 두 갈래로 흐르다 하나로 합쳐지는 식으로 묘사했습니다. 그걸 임 감독이 보더니 ‘교수들은 섹스를 이렇게 싱겁게 해요?’하더군요. 임 감독 때문에 담징이 원래 썼던 것보다 훨씬 야한 스님이 됐습니다.(웃음)” 김 교수는 곧 1921년 시베리아에서 일어난 자유시사변을 소재로 한 차기작 집필에 들어갈 예정이다.

글=기선민 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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