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對北 잠재적 카드는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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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북핵 문제가 머지않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는 가운데 서울에서는 남북 장관급회담이 열렸다. 핵문제는 본질상 범세계적 사안인 만큼 싫건 좋건 북핵 문제가 안보리에 회부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안보리에서는 미국은 물론 중.러 등 대부분의 이사국이 북한의 핵 보유에 반대하는 입장이므로 유엔헌장 상의 수순에 따라 우선 권고, 외교적 조치 등을 담은 입장표명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벌써부터 안보리의 제재 조치를 전쟁선언으로 간주한다며 벼랑끝으로 한걸음 더 다가설 태세를 보이고 있다.

*** 평화공존 기초 유지되려면

북한 지도부에는 현 체제의 생존이 최대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최후의 카드인 핵과 미사일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다. 벼랑끝 전술을 쓰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 두 카드를 포기하지 않으려다 끝내 벼랑끝으로 떨어져버릴 수도 없는 일이다.

체제 보장을 위해 불가침협정을 대가로 요구하고 있으나 그것이 약소국을 끝내 지켜주지 못했던 역사적 사례를 익히 알고 있을 것이므로 불가침 약속의 틀 안에 북한의 생존을 보장받을 확실한 반대급부를 최대로 포함시키지 않고서는 좀처럼 두 카드를 버리려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외교적 거래로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물밑 작업이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징후가 계속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이 복잡한 외교적 협상과정에서 한국의 국익은 무엇이며 어떻게 소외되지 않고 이를 확실히 챙길 수 있을 것이냐에 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국토분단 이래 반세기 동안 지속돼 온 대북 정책 패러다임에 일대 전환을 일으킨 역사적 결단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햇볕정책은 정책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그 목적은 당분간 남북 간 평화공존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전쟁 재발을 막고 평화적 통일의 여건을 조성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공존관계가 구축되려면 동.서독의 경우처럼 반드시 선행돼야 할 전제조건이 있다. 그것은 남북 간의 힘의 균형과 상호 신뢰다.

1991년 남북 간에 합의된 한반도 비핵화선언은 햇볕정책의 출범을 가능케 한 남북 간 힘의 균형과 상호 신뢰의 중요한 기초를 형성해준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은 재처리 시설을 보유하고 플루토늄을 생산하며 최근 우라늄 고농축 시설의 건설도 시도함으로써 한반도 비핵화(非核化) 합의를 공공연히 위반하였으며 결과적으로 평화공존의 기초인 힘의 균형과 상호신뢰를 깨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이번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양자 및 다자 차원에서 챙겨야 할 가장 중요한 국익은 바로 남북 평화공존의 기본 틀이 무너지지 않도록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현 정부가 햇볕정책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북한 당국에 보여 온 여러 가지 유화적 조치들을 국민들은 이해를 하면서도 착잡한 심경으로 지켜봐 왔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대화와 교류의 모양새 유지에 급급하다 더욱 근본적인 남북 평화공존의 기초를 북한이 일방적으로 깨는 행동을 계속 방치한다면 앞으로 새 정부의 평화공존정책 추진에 큰 부담을 안겨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우려된다.

*** 대응 급급보다 實益 챙겨야

이번 남북 장관급회담에서도 북한 측이 민족공조를 내세우는 입장을 맞받아, 막상 민족 내부의 비핵화 약속은 저버리면서 그 해결은 미국하고 하겠다는 것이 과연 민족 공조인지, 핵무기를 안만들겠다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점을 따지고 우리도 상응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당당한 태도로 나가야 마땅하다고 본다.

온 세계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데 우리가 해야 될 몫은 안하면서 제3자에게 우리의 이익을 챙겨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북한이 계속해 새로운 카드를 들고나올 때마다 그 대응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보유하고 있는 잠재적 카드들을 적극 개발해 북한과 다른 당사국들을 상대로 다각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우리 나름의 실익을 착실히 챙기는 창의적인 접근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이시영(전주대 총장,전 외무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