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70퍼센트의 철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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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로도 방영되고 있는 『상도(商道)』라는 소설은 중국을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하던 한 상인이 조선 최고의 거부로 부상하는 과정의 우여곡절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작은 이익에 매달리는 상술이 아니라 세상을 이롭게 하는 상도를 강조하지만, 솔직히 돈을 버는 게 어렵지 부자가 된 다음에 대인군자 흉내내기는 쉬운 일이다.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며 정작 공감한 부분은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인보다 더 가까이 둔, '가득 채움을 경계한다'는 이름을 지닌 술잔이 암시하는 철학이다. 이 잔은 끝까지 부으면 술이 차지 않고 사라져 버리며, 70%만 채우면 그대로 술이 남아 있다고 한다.

*** 갈등.고민 따르는 의사 결정

인생은 선택의 과정이다. 그런데 미래는 늘 불확실하기 때문에 의사결정에는 갈등과 고민이 따른다. 성공한 사람들의 경험담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천기를 엿보려고 점쟁이를 찾기도 하지만 남의 얘기를 듣고 성공을 모방하기란 쉽지 않다. 똑같은 방식으로 노력했다 해도 성공하면 비결이 되고 실패하면 변명이 되는 것이 인생살이다.

일처리가 꼼꼼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야만 성이 차는 사람들은 모험을 즐기지 않는다. 모험을 하기에는 준비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완벽주의자들의 단점은 '실패에서 배우는 경험'을 스스로 배제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성공에 대한 열망이 약해서가 아니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에 도전을 회피한다. 반면 조금만 가능성이 보여도 모험에 뛰어드는 사람은 장기적으로 볼 때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가면 갈수록 모험의 정도가 커져 한번 실패하면 앞서 이룬 성공마저 허물기 쉽다. 도박에 발을 들인 사람이 결국은 빈털터리가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실패가 너무 잦거나 치명적인 것은 곤란하지만, 평소에 잔병을 좀 앓아야 큰 병을 피할 지혜를 배우듯 어느 정도 '실패연습'을 해두어야 비로소 큰 승부를 할 용기와 지혜가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완벽주의자의 함정과 모험주의자의 우둔을 함께 피할 수 있는 선택의 분기점은 어디일까. 실패할 확률은 있지만 한번 해볼 만하고 설사 실패를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승산이 있다고 믿는 자신감을 줄 수 있는 자기 암시는 무엇일까.

*** 최선보다 차선을 구해야

나는 '70%의 가능성'을 하나의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사업가 손정의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은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경우 대개 70% 정도의 승산을 선택의 선으로 본다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소설 『상도』에 나오는 술잔도 결국 같은 철학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내가 이 '70%의 철학'을 처음 접한 것은 가난한 미국 유학시절의 일이었다. 당시 어렵게 돈을 모아 10년 묵은 고물 중고차를 샀는데 첫 차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조금만 고장이 나도 정비소를 찾곤 했다.

그런데 단골이던 중국인 정비공이 나만 보면 못마땅한 얼굴로 "70% 오케이□ 오케이!" 라고 짧은 영어를 동원해 말하곤 했다. 번역하면 "야 이놈아, 이런 똥차가 대충 굴러가면 되지 완벽하게 고칠 필요가 어디 있느냐. 그저 70% 정도면 되는 것이여"가 된다.

나는 지금도 그의 철학을 떠안고 산다. 경제정책에 대한 글을 쓰면서 최선을 찾는 어리석음보다 차선을 구하는 현명함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개혁은 모험정신을 요구하지만 그 전략은 겸손해야 한다고 믿는다.

처음부터 완벽한 결과를 추구하는 것보다 70%의 성공을 염두에 두는 것이 우월한 전략일 수 있다. 세상에 정도(正道)는 존재하지만 쉽게 보이지 않는다. 당장 손으로 잡으려 하기보다 그것에서 멀어짐을 경계하는 것이 어쩌면 진정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길일 것이다.

지나간 3백65일을 돌이키는 오늘, 조금은 여백을 두고 송년의 잔을 채워본다. 그런데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똑같이 '70%의 철학'을 소화한 다른 사람들은 베스트셀러를 썼고 인터넷 제국을 이루었는데 나는 뭔가. 평범한 사람들에겐 그렇게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그래도 희망의 불씨는 남아 있다. 내일이면 새로운 3백65일이 다가오니까.

全周省 이화여대 교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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