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지구 한바퀴 "삶을 재충전 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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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훌훌 떨치고 자, 떠나자. 세계로!"

햐아, 말은 좋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세계는커녕 이 작은 반도 한 모퉁이라도 여행할라치면 왜 그리 걸리는 게 많은지.

그런데 지난해 정말 모든 걸 훌!훌! 떨치고 세계일주 배낭여행을 떠난 가족이 있어 크게 화제가 됐다. 서울시 3급 공무원인 시정개혁단장 이성씨네 다섯 식구다.

『온가족 세계 배낭 여행기』는 이씨가 지난해 7월 11일 홍콩행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을 출발, 올해 7월 10일 정확히 3백65일만에 인천공항으로 입국하기까지 세계 45개국을 돌며 쓴 여행일지다.

그동안 가족과 함께 매일 일기를 쓰고 또 웹투어 여행사의 인터넷 사이트에 중간중간 정리해 올려놓았던 글을 모은 것이라 현지의 생동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더욱이 공무원이라는 직함이 주는 선입견과는 달리 1999년 월간 『문학세계』에 수필 '돈바위산의 선물'과 '아버지'로 등단한 저자의 글은 재치있고 맛깔스럽다. 중국.인도.아프리카.유럽까지의 일정이 담긴 1권이 먼저 나왔고 곧 이어 2.3권이 나올 예정이다.

고려대 법대를 나와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무원으로 '잘 나가던' 이성씨가 지난해 덜컥 무급휴직계를 냈을 때 사람들은 모두 무슨 일이냐고 법석을 떨었다. 그는 남자라면 열 명 중 다섯은 한번쯤 생각해봤을 일 아니냐며 태연했다.

하지만 더 대단한 사람은 이씨의 제안에 몇 초만에 동의했다는 그 부인이다. 아버지만큼이나 학교에서 잘 나가던 중 3 아들 등을 데리고 아파트 전세값 9천만원으로 여행가자는 남편의 말에 순순히 따를 여성이 얼마나 되겠느냐 말이다.

정작 딴지를 걸고 나선 것은 아이들이었다.1년 휴학하면 친구들보다 늦게 학교를 다니게 되는게 창피하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이씨는 일을 저지른 후에, 그러니까 휴직계를 낸 후에야 남들을 위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들이댔다.

먼저 항상 선두에 서서 상한가를 쳐온 19년 직장생활을 돌아보고 재충전할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처남이 상처한 후 막내아들처럼 기르고 있는 처조카를 끈끈한 가족의식으로 묶어줄 기회가 될 거라는 기대였다.

특히 그는 여행을 통해 점점 흑백논리로 중무장되어 가는 아이들에게 좀 더 여유로운 마음, 열린 사고를 갖게 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강남은 다 좋고 강북은 후지다는 식의 생각, 메이커는 뭐든지 다 좋다는 생각,1등이 아니면 필요 없다는 식의 쏟아지는 광고, 이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 수 있을까? 영호남 갈등보다 더 심한 흑백논리가 우리 사회 전체에 쫙 깔리지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행일정도 후진국들에 큰 비중을 뒀다.

인도에선 카스트 제도의 4개 계급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가촉(不可觸) 천민들이 모여사는 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여행 시작 닷새만에 맞은 부친의 사망소식,1년도 못돼 그 뒤를 따른 모친 이야기 등 가슴아픈 사연도 많다. 소매치기를 당해 낭패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목적에 따른 결과는 대성공이었던 듯 싶다. 굳이 어디론가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이들이 아니더라도 빡빡했던 한해의 삶을 돌아보는 이들에게 되새겨볼거리를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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