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어라, 더 깊은 잠의 심연에서 깨어 있으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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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스타일의 프랑스 작가 앙리 프레데릭 블랑은 ‘문학은 마지막 남은 자유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자유란 무엇보다 시간과 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런 의미에서 잠은 일상에서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쉽게 잠들지 못할 때 이는 물질만능주의와 기능주의에 함몰된 세계가 내리는 형벌과도 같다.

문학은 마지막 남은 자유의 공간
『잠의 제국』(임희근 옮김, 열린책들)에서 블랑은 우리에게 이른 아침의 숙면을 방해하는 자명종을 꺼버리라고 말한다.

꿈의 마르코폴로이자 잠의 콜럼버스인 불면 치료 전문의 조제프 카발랑티의 옷장에는 40벌의 잠옷과 단 한 벌의 외출복이 있다. 그는 수면제 처방 없이도 일상의 어두운 밑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는 이른바 ‘수면기’를 발명한다. 자명종과 정반대 기능을 지닌 그 기계는 잠의 콜럼버스인 조제프가 새로운 잠의 제국을 갈구하는 온 인류에게 전하는 복음과도 같다.

그러나 외로운 영웅(?)의 맞은 편에는 그를 곤경에 빠뜨리고 음모에 휩쓸리게 만드는 악당 같은 인물이 항시 존재하게 마련이다. 이 소설의 악당은 바로 수면제 제약회사 사장인 라피옹이다. 그는 저열하게도 조제프의 ‘수면기’를 광고 유포에 이용한다.

이에 맞서 조제프는 타히티에서 열린 수면학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한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결과는 정신병자라는 오명뿐. 결국 조제프는 단짝인 고양이의 흐벅진 하품과 더불어 고향 섬에 정착하게 된다. 그곳은 마음껏 잠자고 꿈꿀 수 있는, 말 그대로 ‘잠의 제국’이다.

신랄한 냉소, 위트 있는 문장, 책 밖으로 빠져 나오는 순간 모든 디테일들이 한눈에 되새겨지는 섬세한 구조, 재치 만점의 대사 등이 맞춤하게 짜인 이 소설은 앙리 프레데릭 블랑이 1989년 발표한 데뷔작이다. 일천한 인맥 탓에 15년 동안 무명의 설움을 겪었던 블랑은 이 작품으로 일약 프랑스 문단의 화제작가로 부상했다. 이 원고를 받아든 악트쉬드 출판사의 문학 파트 주간은 아무런 첨삭 없이 원본 그대로 출판하기로 결정 내렸다고 한다. 그만큼 블랑 특유의 투명한 문체와 독창적인 줄거리를 높이 샀다는 말이다.

다소 만화 같기도 하고, 블랙 코미디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 『잠의 제국』은 합리주의와 황금 만능주의에 맹종하는 우리 세계의 초상에 대한 서늘한 음화다. 블랑이 추구하는 세계, 그리고 그가 소설이라는 자신만의 기제로 그려내는 형상은 일견 잘 짜여지고 말끔하게 정리된 듯 보이는 세계의 뒤틀린 이면들이다. 또는, 일상의 가식 뒤에 숨겨진 어떤 진실의 얼굴들이다.

그러나 블랑이 그 어둡고 탁하고 명료하지 않은 세계의 밑그림들을 과장된 수사를 이용해 송두리째 끄집어올리는 것은 아니다. 그의 문체에서 감정의 직접적 노출이나 분방한 형용사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블랑은 사사롭게 삐거덕거리는 일상의 모습들을 딱딱하고 건조한 느낌 그대로 문장 속에 투사해낸다.

인물들은 항상 우리가 겪고 있는 일상의 어떤 모습들을 재연하는 듯하면서도, 블랑 특유의 연극적 공간 안에서 기계적인 움직임을 반복한다. 이런 기발하고 독특한 극적 구조가 단적으로 드러난 작품이 1999년, 블랑의 작품으로는 최초로 번역됐던 『저물녘 맹수들의 싸움』(임희근 옮김, 열린책들)이다.

우리 세계의 초상에 대한 서늘한 음화
이 작품은 『잠의 제국』과 마찬가지로, 겉치레와 물질만능의 기능주의가 판치는 사회 전반에 대한 날카로운 알레고리다. 그로테스크와 엽기적 발상이 선인장의 가시처럼 돋아난 그 미끈한 작품을 『잠의 제국』옆에 두고 읽어 보라. 그야말로 오던 잠도 달아날 만큼의 섬뜩함이 묻어 나올 것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여기 이상한 아이러니가 있다. 잠의 정령, 잠의 인도자로서의 『잠의 제국』을 읽다보면, 그 유려한 속도감과 치고 밀리는 반전 때문에 어느덧 취침 시간을 훌쩍 넘겨버리기 십상이다. 그토록 잠을 찬미하는 소설이 되레 읽는 이의 단잠을 방해하고 만다.

이런 요령부득한 모순을 어떻게 풀이해야할까. 일단 잡은 책을 끝까지 읽어나가야 할까. 아니면 책장 사이에 갈피를 끼워 둔 채, 깊은 잠을 청해야할까. 물론, 선택은 이 책을 집어 든 당신의 판단에 달려있다. 조제프가 인도하는 ‘잠의 제국’은 모든 강요로부터의 탈출과도 다름없을 테니까.

(강정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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