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한류는 분명히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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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중국과 베트남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읍니다. 베이징과 상하이, 호치민(사이공) 시를 건너 뛰듯 지나는 1주일의 여행은, 초행길의 제 눈에 일종의 '시간여행'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여정상 겨울-가을-여름으로 이어지는 듯한 날씨도 그랬거니와, 제 눈에 비치는 풍경들도 시간을 거슬러 가는 듯한 기분이었거든요.

*** 베트남 진출한 '엽기적인…'

사실 이번 여행은 요즘 이들 지역에 불어닥치고 있다는 이른바 '한류(韓流) '에 대해 현지에선 어찌들 생각하고 있는지, 그 쪽 언론계에 계신 분들과 의견을 나눠보는 게 주목적이었습니다만, 앞서 말씀드렸듯 초행인 제 눈엔 '젯밥'이 먼저 들어왔다는 게 솔직한 고백일 듯 싶습니다.

그래도 먼저 한류에 대해 한 마디 하고 지나가는 게 순서겠지요. 가서 보고 느낀 확실한 것은 '한류'란 분명히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또한 가기 전에는 혹시 우리가 지나치게 부풀려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더랬습니다.

하지만 한류라 부를 만한 것은 분명히 있었고, 그 쪽에 계신 분들도 한류의 존재라는 것 만큼은 다들 인정하시는 분위기더군요. 물론 현재의 한류란 것이 청소년층에 국한됐고, 과거 '일본류'처럼 일시적인 유행에 그치리라는 토를 달기는 하셨습니다만.

한류에 관해 두가지만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첫째, 어떤 경우에서건 이러한 자발적 문화교류에 있어서 정부는 빠져주어야겠다는 것. 일부에서 일종의 조정자로서 정부의 역할을 기대하는 얘기가 나오고, 정부 또한 그런 몸짓을 비추었지만 이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듯 싶습니다. 둘째는 현재의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한 대중문화 외에 보다 다양한 장르의 문화상품이 소개되어야겠다는 것. 그 쪽 수요가 분명히 있고, 또 그래야 현재의 한류를 보다 폭넓게 지속시킬수 있겠다는 점에서입니다. 얼마 전 있었던 '지하철 1호선'의 공연이 좋은 예가 되겠지요. 한국에서 흥행에 대성공한 '엽기적인 그녀'가 베트남 현지 언론에서 비판의 표적이 됐다는 것도 되새겨봐야 할 대목이구요.

이 쯤에서 화제를 돌려볼까요.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베트남의 모습이었습니다. 체제상으로 아직 경직됨이 느껴지고, 경제적으로 피폐함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지만 곳곳에서-물론 호치민시와 그 주변에 불과했습니다만-마주친 삶의 모습들은 정겹고 따스했습니다. '시간여행'이라 말씀드렸지요.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달랐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언뜻언뜻 지난 날 저희가 살아온 모습을 떠올렸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더욱 뜻깊었던 것은,아직은 피폐하지만 그 피폐함을 곧 벗고 일어서리라는 확신 같은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었구요.

사이공강 유람선 부두에서 조악한 부채를 팔면서 그냥 1달러를 내밀자 똑 부러지는 영어로 "돈을 달라는게 아니예요, 이걸 파는 거지요(I don't need money,I just sell!) "하던 대여섯살 먹은 남자아이에게서 한방 먹은 느낌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이상하겠지요.

또 메콩강변에서 좌판을 벌이고 한국말로 "땅콩사세요"하다, 얼마 되지 않은 땅콩을 팔아준 일행이 탄 배가 저만큼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던 열살 남짓한 여자아이의 눈망울에서 순수함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 또한 무심한 사람이겠지요.

*** 메콩강변서 "땅콩 사세요"

그리고 술 한잔 함께 하면서 영어솜씨를 칭찬해주자 "영어학원에 다니고있어요"라며, 1년 반째 배우고 있는 영어가 요즘 부쩍 느는 기분이라고 즐거워하던 스물두살 먹은 베트남 아가씨에게서 우리네 살아온 모습이 오버랩되지 않았다면 경험이 주는 교훈을 깨우치지 못한다는 비난을 들어 마땅할 거구요.

한 해가 끝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정말 모두들 쉽지 않게 보내온 한 해였지요. 하지만 어디에든 희망의 싹은 있게 마련입니다. 베트남에서 가졌던 느낌들은, 지금 이 곳에서도 얼마든 변용된 모습으로 느껴볼 수 있는 거구요. 새해엔 그 싹들을 찾아 키워보실까요.

박태욱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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