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일동포가 자초한 민족은행 불발탄

중앙일보

입력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일본에서 민족은행 설립이 벽에 부닥친데 대한 동포사회의 반응은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한국 정부와 민단, 동포기업인들은 민족은행인 드래곤은행을 세우려 올 초부터 내내 공을 들여왔다.일본 정부로부터 1조엔의 공적자금을 지원받아 간사이(關西)흥은 등 도산한 동포조합을 인수해 은행으로 전환한다는 계획이었다. 한국 정부는 새 은행에 출자를 해 부실자산이 없는 클린뱅크로 만들어줄 작정이었다. 일본 당국도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계획 자체는 무리가 없었다.명분도 좋았다. 그러나 막상 실무작업에 들어가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서로 분열해 대립하는 동포사회의 고질병이 도진 것이다. 명분에는 모두 동의하면서도 서로들 "아무개가 주도하는 꼴은 못본다"고 우겨댔다.

끝까지 합의를 보지 못해 결국 간사이흥은 등의 입찰은 기존 동포조합들이 참가해 드래곤은행과 경합을 벌이게 됐다. 출자금 모금도 드래곤은행으로 집중되지 못한 채 큰 동포조합 몇군데로 갈라져 나갔다.

이쯤 되자 일본 정부도 생각이 달라졌다고 한다. 동포들의 통일은행으로서 대표성이나 주도권이 없는 드래곤은행을 굳이 지원할 이유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공적자금을 가장 적게 요구한 곳을 인수기관으로 선정키로 한 것이다. 클린뱅크를 염두에 두고 많은 공적자금을 제시한 드래곤은행은 이 기준에서 밀려 은행간판도 못달아보고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자국 국민의 혈세로 조성된 공적자금 지원을 최소화하려는 일본 정부를 탓할 수는 없다. 또 주일대사관은 금융기관 관할권이 없는 데다 동포사회의 합의를 이끌어낼 만한 능력도 없어 책임을 따지기조차 어렵다. 결국 동포사회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다.

이제 동포조합들의 추가부실을 막는 것이 화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공적자금을 지원받고도 다시 도산하면 동포사회의 금융기반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이는 재일동포가 일본 땅에서 돈 빌릴 곳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일본 정부나 은행이 사정을 봐줄리도 없다.

권투경기는 체급이라도 있지만 금융은 무제한 승부다.동포조합들은 스스로 중량급 통일은행을 마다하고 가장 경량급인 신용조합으로 제각각 링에 오르기로 한 셈이다.찢어지고 갈라지는 것도 선택이라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서조차 단합된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이 최악의 선택일 것이다.

도쿄 남윤호 특파원 yh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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