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현장르포] 下. 화려한 외양 뒤 개혁의 상처 곪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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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북쪽으로 죽 뻗은 루블룝스코에 대로(大路)를 따라가다 외곽 환상도로를 건너면 러시아 특유의 눈 덮인 완만한 벌판이 나타난다.

잘 생긴 자작나무 숲을 따라 조금 더 가면 모스크바 시내의 칙칙하고 황량한 고층 아파트와 완전히 다른 별세계가 펼쳐진다. 산뜻한 밝은 색 지붕의 3층짜리 유럽풍 전원주택들이 밀집해 있는 바르비하 단지다. '노비 루스키(러시아 신흥부자)'들이 모여사는 부자촌이다.

예술품 거래가 직업인 바딕 넴초프(42)는 이곳에 산다. 최소 60만달러 이상인 3층집은 한 층 크기가 대략 60~70평. 가족은 부인과 네살.한살 난 두 딸. 이런 집을 또 한 채 갖고 있는 그는 '벤츠 500'을 몰고 다닌다. 넴초프는 젊은 시절 지역 청년 공산당 중간간부였다.

그가 어떻게 이런 부자가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슨 곡절이 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확실한 것은 그가 지난 10년을 무척 고맙게 여긴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두가 지난 10년을 고맙게 여기는 건 아니다.

넬리가르보바 리리야나(27).부동산회사 직원.모스크바 출신인 그녀는 1998년 사범대학을 졸업한 뒤 세상 쓴맛을 알게 됐다. 큰 꿈을 안고 시작한 사립학교 교사의 월급은 2백달러. 곧 지금 직장으로 옮겼다.현재 월급은 3백달러. 그나마 아파트 임대비 등 이것 저것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다. 더 좋은 직장을 잡으려 경영학 공부를 하고 있다. "시장경제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은 하지만 눈길은 흔들렸다. 개혁 10년의 폭풍이 휩쓸고 간 러시아는 상처로 혼란스럽다.

◇ 화려해진 모스크바=겉으로 본 모스크바의 발전상은 대단하다. 97년 말 이후 4년 만에 다시 찾은 모스크바는 서유럽의 대도시보다 더 화려해 보인다. 광고판이 홍수를 이루고,휘황한 불빛이 반짝인다.

새롭게 단장한 건물, 새로 포장된 도로. 백화점은 더 늘었고, 진열대의 물건은 훨씬 다양해졌다. 자동차는 폭발적으로 늘어 시내 도심이나 부심의 웬만한 교차로는 서울 뺨칠 정도로 막힌다. 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는 차들은 대개 외제차.

신호를 기다리는 운전자들의 손마다 휴대폰이 들려 있다. 자동차는 98년 대비 거의 3배, 휴대폰은 20배 정도 늘었다고 한다. 자본주의 10년이 이뤄낸 성과다. 모두 옛날과 다르다고 한다.그러나 화려함 뒤엔 어둠이 있다.

◇ 요원한 중산층=소련 붕괴 전 전기.전자제품 공장 수리공이었던 바실리에프 알렉산드르(35)는 지금 외국계 기업.대사관 차를 몰면서 월 3백달러를 받는다. 치과병원 간호사인 부인 악산(34)의 월급까지 합하면 월소득 6백~7백달러. 이 정도 소득이면 러시아 중산층이다.

그러나 서구적 의미의 중산층은 아니다. 국민총생산(GNP)의 40%를 차지하는 부유층 10%와 빈곤층 40%를 제외한 나머지를 중산층으로 분류하는 기준에 따른 것이다. 러시아에서 진짜 중산층은 1~2%에 불과하다는 것이 사회학자들의 분석이다. 사법관청 공무원 경력 20년의 아나톨리(39)의 월급은 2백달러밖에 안된다. 특히 중산층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공무원.교사.의사.엔지니어 등이 무더기로 신빈곤층으로 전락, 성장의 의미가 퇴색하고 있다. 어린이의 70%가 빈곤층 가정에서 산다.

낮은 소득 탓에 공무원 부패도 여전하다. 개혁파의 기수인 보리스 넴초프 경제담당 전 부총리는 지난 8월 미 카네기 재단 주최 '러시아 10년' 세미나에서 "부패는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성토했다. 그는 "국제사회 지원금 가운데 7천만달러 이상을 빼돌리거나 무기거래에 개입해 2억5천만마르크를 꿀꺽한 부총리도 있다. 부패로 인한 국부(國富)유출이 매년 2백억달러나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수년째 사업을 하는 한국인 金모씨는 "세무서나 세관의 뇌물 풍속도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전에는 무조건 받았지만 지금은 가려서 받는다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부패 척결 의지 탓이다. 하지만 "얼마나 갈지 두고 볼 일"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 개혁 피로증=지난 15일 이른 아침 모스크바에서 지하철을 탔다. 지하 깊숙이 자리잡은 연결 통로엔 술에 취해 자는 사람들이 있다. 뚱뚱하고 건장한 부인이 곤드레가 된 남편을 손수레에 실어 끌고가기도 한다. 일주일 낮밤 가리지 않고 보드카를 마시는 사람도 있다. 술이 넘친다.

러시아 심리과학연구소에 따르면 지난 10년새 알콜이나 약물중독에 걸린 사람이 10만명당 2백명에서 3백명으로 늘었다. 체제 전환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요인 중 하나다. 마약은 더 심각하다.

최근 4년새 마약 사범이 6백%나 늘었다. 특히 학생들의 마약중독은 전체 평균보다 6~8배나 많아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학생 5명당 1명이 마약을 접한다. 개혁은 화려함과 상처의 두 얼굴로 러시아 사회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모스크바=안성규 순회특파원 ask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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