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 칼럼] 정치-벤처유착 실상 밝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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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설과 의혹을 내세우는 정치권의 진흙탕 싸움은 그칠 줄을 모른다.

그들은 혀도, 귀도 성하건만 어느새 서로의 말을 못알아 듣는 지경까지 이르렀다('여야 의혹공방 진흙탕 속으로').

막말이 판을 치고 근거 없는 거짓말이 난무하고 실행 없는 헛말을 예사로 내뱉는다. 독사의 혀처럼 독설을 내뿜지만 그것은 정의를 세우기 위한 말은 아니다('여야 폭로경쟁 진실 물타기 우려'). 자신을 내세우고 기득권의 성(城)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만 무성하다.

정의를 일으켜 세우는 올곧은 말은 이제 듣기 힘들어졌다. 말의 길을 책임지고 있는 언론도 언제부터인가 참말을 잊어버렸다. 참말이 없는 거짓의 시대에 들려온 언론인 송건호 선생의 부음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언행일치라는 간단한 신념을 지킨 '영원한 언론인' 송건호 선생이 지난 21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말과 행동을 같이 한 진정한 언론인의 맥은 이제 어쩌면 거의 끝자락에 다다랐는지도 모르겠다. 올곧은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우리의 귀는 참말과 거짓말을 갈라 듣지 못한다. 사람들은 참말을 모두 잊어버려 말 자체를 알아듣지 못한다.

언론이 죽으면 사람들이 말을 잊어버린다. 정의와 자유와 인권과 평화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들리지 않는다. 비리와 싸움이란 말만 있을 뿐이다.

혹독한 군사독재 시대에 우리는 잃어버린 말들을 되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러나 이제 우리는 누가 빼앗아가지도 않는데 스스로 말을 잃어버리고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말은 얼마나 많고, 그래서 잊어버린 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언론은 이제 잃어버린 말들을 다시 찾는 역할을 되살려야 한다.

'인권전령사 8년'이란 기사는 '인권하루소식'이 지령 2000호를 맞았음을 전해주고 있다. 8년 전에 시작한 '인권하루소식'은 참말을 잃어버리고 할 말을 잊어버린 이 시대의 말을 되살릴 자그마한 희망이다.

이런 참언론이 있기에 우리가 아직까지 인권이란 말을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말을 전달하는 신문은 우리가 먹고살만해지면서부터 잃어버린 말들이 무엇인지 그 말들을 다시 찾아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사명이 있다.

벤처기업과 권력집단의 은밀한 뒷거래가 한국 정치와 경제를 한꺼번에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있다. 야당은 각종 의혹에 대해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한다. 대통령은 이에 대해 "성역 없이 진상을 투명하게 밝히라"고 지시했다.

이들 벤처게이트의 실체적인 진상들이야 앞으로 드러나겠지만 사실은 이미 사후약방문이다. 이번 기회에 벤처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어떤 문제를 지니고 있는지를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벤처기업의 실태와 구조적인 문제점에 대한 심층보도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있었던가?

당시에는 모두들 벤처신화와 인터넷 강국이란 구호를 증폭하는 데 앞장서지 않았는지, 그저 잘 나가는 벤처 기업가를 대문짝만하게 소개하기에 급급하지 않았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벤처기업의 정치와 경제,문화를 함께 엮어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현준-진승현-이용호-윤태식게이트로 이어지는 '정치-벤처유착'이 연일 지면을 덮고 있는 동안에도 국제정세는 긴박하기만 하다. 아르헨티나에서 폭동이 일어나 대통령이 사임했고,미국은 '제2테러대전'을 모색하고 있으며,중동의 분쟁은 악화일로에 있다.

그나마 이러한 세계정세의 흐름을 우리 입장에서 짚어준 '중동 테러전 강 건너 불 아니다'같은 기사마저 없었다면 집안싸움에 세상만사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를 한주였다.

白旭寅 <서울산업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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