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차 매매 소비자 보호 '헛바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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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차를 매매할 때 차의 성능과 상태를 기록한 문서를 구입자에게 주도록 하는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정부가 중고차 구입자를 보호하기 위해 지난 4월 자동차 성능점검 기록부 교부제도를 도입했으나 매매업자와 소비자들의 외면으로 겉돌고 있는 것이다.

◇ 피해 사례=사업을 하는 李모씨는 중고차 매매센터에서 중형차를 구입할 때 주행거리가 5만2천㎞임을 확인했지만 수리 과정에서 실제 주행거리가 9만㎞를 넘었던 사실을 발견했다.

회사원 尹모씨는 자동차 매매상사에서 "무사고 차량이며 상태도 양호하다"는 매매업자의 말만 믿고 중고 승합차를 샀으나 사고가 났던 차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게다가 판 사람이 명의이전을 안해줘 자동차 등록원부를 확인한 결과 체납액이 1천만원에 가까워 매매가 안되는 차였음을 알았다. 한국소비자보호원에 접수된 중고차 관련 불만 사례들이다.

올 상반기 중 한국소비자보호원에 접수된 중고차 관련 피해 상담건수는 2천4백93건이나 된다. 지난해 상반기(1천8백18건)보다 37%나 늘어난 것이다.

지난 10월까지의 상담건수는 3천5백81건이나 된다. 주로 주행기록 조작.사고경력 은폐.연식 은폐 등에 관한 내용이다.

◇ 유명무실한 제도=지난 4월부터 시행한 '성능점검 기록부 교부 제도'가 제대로 운영되면 이같은 피해를 줄일 수 있지만, 중고차 매매현장에서는 이 제도가 잘 안지켜진다.

매매업자가 소비자에게 중고차를 팔 때 차의 성능.상태에 대해 기록부를 작성해 넘겨주도록 함으로써 사고경력 은폐.주행기록조작 등을 줄여보자는 게 이 제도의 취지다.

그러나 상당수 중고차 매매단지는 성능점검 설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정비사가 육안으로만 동력전달.조향장치 등의 성능을 판별하고 있다.

경기도 용인의 중고차 매매업자 김모(42)씨는 "조합이 지정한 성능점검 업소가 너무 멀어 점검을 받으러 차를 가져 갈 수 없기 때문에 정비요원이 장비 없이 출장을 와 기록부를 만들어 준다"고 말했다.

또 일부 매매상사에서는 기록부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 추후 하자가 발생할 경우의 책임 때문에 이를 지키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비자들도 이런 제도가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서울 강서구 등촌동 매매단지의 박 모(37) 사장은 "다른 매매상사의 직원이 우리 차를 팔아줄 경우에는 성능점검기록부를 주지 않는 사례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소비자보호원의 박인용 자동차.통신팀장은 "소비자들과 상담을 해 보면 성능점검 기록부 제도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매매업체들이 성능점검 기록부를 소비자에게 주지 않거나 허위로 만들어 준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특히 성능점검기록부를 교부한 이후 차량에 문제가 생겨도 기록부가 법적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는 점도 문제이다.

매매업체 관계자는 "기록부를 받아간다 한들 이 내용에 대해 차 성능 점검자나 판매자 모두가 법적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효용도 없다"며 "법적 구속력이 없는 기록부는 요식행위일 뿐"이라고 말했다.

현행 규정에 따르면 성능점검을 할 수 있는 시설은 ▶일정 규모 이상의 정비사업자▶매매 사업자 조합▶교통안전공단 산하의 자동차 검사소 등이다.

이 중 점검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교통안전공단의 경우 건당 검사비용이 3만원이다 보니 이용 사례가 거의 없다. 서울 성산검사소의 경우 중고차 업체에서 성능점검을 의뢰하는 건수가 한달에 다섯 건도 안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중고차 업체들은 조합에서 정한 장소에서 건당 3천원~1만원의 비용을 들여 기록부를 발급받고 있다.

중고차 업체 관계자는 "성능점검을 할 수 있는 시설을 늘리고 점검절차를 합리적으로 조정해 업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한 뒤 이 기록부의 법적 구속력을 높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렬.이승녕 기자 younglee@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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