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쌀값 정치적 결정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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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림부가 내년 추곡 수매가를 올해 수준으로 동결키로 한 것은 세계무역기구(WTO) 쌀 시장 개방 협상을 앞두고 수매가를 단계적으로 인하하기로 한 그동안의 농업 대책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로 한마디로 한심하다.

농정 당국의 이처럼 안이한 인식과 미약한 추진력으로 시장 개방의 거친 공세를 어떻게 대처할지 걱정스럽다. 비록 당장은 농민에게 인기없는 쌀 정책이지만 이 정부에서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훗날 큰 멍에로 남을 것이다.

재론할 것 없이 다가올 쌀 개방에 대한 최선의 대비책은 쌀의 국내외 가격차를 좁혀 가격 경쟁력을 키우는 일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일본과는 정반대로 국제 경쟁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길을 걸어왔다.

일본이 1990년대에 추곡 수매가를 지속적으로 인하, 현재의 쌀값이 90년 수준을 밑도는 반면 우리는 그동안 몇차례 동결한 것을 빼고 해마다 4~7% 올려 10년 전의 두배나 된다.

그 결과 현 국내 쌀값은 미국산의 5.8배,중국산의 6.1배,태국산의 9.1배 수준에 이르고 있다. 만약 쌀 시장이 열려 관세화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닥친다면 관세를 규정상 기껏해야 4백%밖에 부과하지 못할 처지여서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이처럼 거듭된 농정 실패에도 불구하고 현 시점에 와서도 수매가 인하를 꺼린다면 경쟁력 확보는 첫발부터 구두선(口頭禪)에 그친다. 문제는 추곡 수매가가 국회 동의 과정에서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는, 더 미덥지 못한 정치권의 행태다. 그렇지 않아도 여야는 정부가 지난해 3%로 올린 수매가 인상안을 4%로 바꾼 사례가 있다.

농정은 이제 피할 수 없는 대전환을 앞두고 있다. 내년 추곡 수매가는 경쟁력 확보에 초점을 맞춰 인하 폭을 다시 조정해야 한다.

대신 논농사 직불제의 단가를 높이고 범위를 확대해 소득 보장의 폭을 늘리고,휴경제를 도입하는 데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 여야도 수매가 결정에 정치 논리를 앞세우려면 차제에 수매가의 국회 동의를 받게 한 양곡관리법을 고쳐 결정권을 농정 당국에 넘기는 게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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