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 시의 ‘애비’를 복원하며 -『화사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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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당 시전집』(민음사)을 비롯해 미당의 시집들은 많이도 나와 있지만, 과연 미당을 한국 문단에 ‘시인’으로 각인시킨 ‘진짜 시집’이 무엇인지 아는 이는 많지 않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시집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 『화사집』은 본래 1961년 남만서고(南蠻書庫)라는 출판사에서 1백 부 한정판으로 간행된 미당의 첫 시집이다. 당시 『화사집』을 발행한 이는 당시 서정주와 함께 주목받던 시인 오장환이었다.

미당 서정주의 첫 시집이라는 이름값만으로도, 또 1백 부 한정판이었다는 희소성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귀하다. 그러나 꼭 60년 만에 다시 태어난 이 책을 더욱 가치있게 만드는 것은 당시 규칙으로 통하던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꾼 것말고는 원문을 그대로 따라 표기했으며 초판본에 실렸던 시인 김상원의 발문도 원문 그대로 수록했다는 점.

“詩를 사랑하는 것은, 詩를 生産하는 사람보다도 不幸한 일이다”라는 반어로 시작되는 이 시집의 발문에서 시인 김상원은 “廷柱가 <詩人部落>을 通하야 世上에 그 찬란한 비눌을 번득인 지 어느듯 5, 6年, 어찌 생각하면 이 冊을 묶음이 늦은 것도 같으나 亦, 끝없이 아름다운 그의 詩를 위하야는 그대로 그 진한 풀밭에 그윽한 香臭와 맑은 이슬과 함께 스러지게 하는 것이 오히려 高潔하였을른지 모른다”라고 말하며 첫 시집 출간 이전 이미 몇몇 잡지에 발표한 몇 편의 시만으로 문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던 ‘젊은 시인’ 서정주의 첫 시집 발간을 축하하고 있다.

하다 못해 하찮은 소문에도 근원이 있는 법이고 뒹구는 돌도 나온 곳이 있는 법이다. 길모퉁이에 나른하게 핀 민들레도 저를 그곳에 흘려준 홀씨가 있는데 하물며 세상에 뿌리 없는, 애비 없는 자식이 어디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미당 서정주의 ‘애비’와도 같은 시집이다. ‘국화 옆에서’, ‘자화상’, ‘문둥이’, ‘푸르른 날’… 등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읊조리고 암송하는 미당의 시는 상당한 부피와 양에 이르렀다. 친일 행각 운운하는 정치적 구설수를 넘어서 미당의 시는 마치 모태신앙이라도 되는 양 우리에게 뿌리 박혀 있는 것이다.

복원과 재출간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닌 이 책은 굳이 문학사적 가치나 그 효용을 타진하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반갑고 귀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나에게 선사한 가치는 어린 시절, 시란 무엇인가라는 끝없는 질문에 희미한 실마리를 던져준 싯귀를 다시 한번 되새길 기회를 주었다는 점이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시라는 것은 ‘애비는 종이었다’라고 스스럼없이 고백할 수 있는 솔직한 생명력의 장르라고.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아들.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않는다하는
外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눈이 나는 닮었다한다.”(-‘自畵像’ 중에서) (이현희/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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