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 잃은 돈 … 한 달 새 18조 두둥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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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40억원 금융자산을 가진 은퇴자 A씨(65). 지난해 산 주가연계증권(ELS)이 최근 조기상환돼 현금 15억원이 생겼다. A씨는 이 돈을 종합자산관리계좌(CMA)에 넣었다. 투자처를 못 찾아서다. 정기예금은 금리가 낮고 금융소득종합과세도 걸려 있다. 주식은 불안하고 부동산 또한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기회가 생기면 바로 빼 투자하려고 일단 CMA에 돈을 넣었지만, 언제까지 돈을 연 2%대 CMA에 묶어놓아야 할지 몰라 답답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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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벌이 부부인 회사원 P씨(42·여)는 요즘 매달 생활비로 쓰고 남는 200만원을 꼬박꼬박 MMF 계좌에 이체한다. 투자할 곳을 기다리는 대기 자금이다. P씨는 “주식은 위험한 것 같고, 정말 돈 굴릴 데가 없다”며 “위험성이 높지 않으면서 수익률은 괜찮은 대상이 나타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자산가와 중산층을 막론하고 투자자들 돈이 갈 곳을 잃었다. 정기예금·채권·주식·부동산 어느 하나 투자하기가 마땅치 않아서다. 예금과 채권은 금리가 낮고, 주식과 부동산은 좀체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자산가들 투자 상담을 해주는 금융회사 프라이빗 뱅커(PB)조차 “요즘처럼 투자 권유를 하기 힘든 때가 없었다”고 할 정도다.

 그러다 보니 MMF나 CMA처럼 언제든지 돈을 뺄 수 있는 단기금융상품에 자금이 몰리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MMF 잔액은 지난해 말 63조1380억원에서 지난 1월 말 80조131억원으로 한 달 새 16조8751억원(27%)이 늘었다. 1년 전(60조9027억원)에 비해서는 19조원 증가했다.

CMA 잔액 또한 지난해 말 40조5264억원에서 지난달 말 41조5953억원으로 1조원 넘는 돈이 들어왔다. MMF와 CMA를 합해 최근 한 달 동안 18조원가량이 대기성 부동자금으로 쌓인 것이다. 불투명한 경기 전망으로 인해 기업들이 투자를 미루고 현금을 쌓아두는 것 또한 부동자금을 늘린 요인으로 꼽힌다.

 반면 투자할 곳은 점점 사라져간다. 지난해 인기였던 주가연계증권(ELS)은 최근 수익률이 뚝 떨어지면서 관심이 시들해졌다. 한국투자증권 이창호 PB는 “‘55% 투스타 스텝다운형’ ELS 수익률이 지난해 연 10~12%에서 지금은 6~7%대로 하락했다”고 전했다. ‘55% 투스타…’은 특정 주식 2개 모두의 주가가 2년 또는 3년 내에 시초가의 55% 이하로 떨어지지만 않으면 약속한 수익을 안겨주는 상품. 그 약정 수익률이 지난해에 비해 거의 반 토막이 됐다는 것이다. 이 PB는 “ELS 특성상 요즘처럼 주식 시장의 오르내림이 덜해지면 수익률이 내려간다”고 설명했다.

 브라질 국채도 주춤하고 있다. 브라질 헤알화 가치가 급등한 게 문제다. 지난해 12월 초 헤알당 507원이었던 헤알화 환율은 지난달 31일 547원이 됐다. 신한금융투자 전현진 PB는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이 아닌 비과세 상품이지만 헤알화 가치가 떨어지면 손실을 볼 수 있어 꺼리는 분위기가 짙어졌다”고 말했다.

 그나마 이달 15일 이전 가입분까지 비과세 혜택이 유지되는 보험사의 상속형 즉시연금 정도에 돈이 몰리는 상황이다. 매달 즉시연금 6000억원어치를 판매하는 삼성생명에서는 이달 판매를 시작한 1일에만 5000억원이 팔렸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생보사 관계자는 “역마진 우려가 커져 보험권이 한 달 1조원을 약간 넘는 정도만 즉시연금을 팔 수 있다”며 “한 달 새 MMF·CMA에 쌓인 18조원을 해소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양”이라고 전했다.

 연·기금 같은 기관투자가는 사모투자펀드(PEF)에 눈을 돌리고 있다. 기업 지분과 경영권을 확보해 가치를 올린 뒤 매각함으로써 수익을 내는 투자 방식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PEF 신규 투자자금은 9조7000억원으로 2011년(6조5000억원)보다 50% 가까이 증가했다. 국민연금·한국정책금융공사 등 대형 연·기금이 전체 약정액의 47%(4조6000억원)를 차지했다. 박재흥 금감원 사모펀드팀장은 “저금리에 주식시장마저 지지부진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높은 수익이 기대되는 PEF 투자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라며 “연·기금이 안정성을 중시해 PEF를 꺼렸던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현재 늘어나는 부동자금이 금융불안을 부를 정도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한국금융연구원 임진 연구위원은 “단기 자금에 돈이 쏠리면 금융회사들이 장기 대출용 자금을 마련하는 비용이 높아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되면 대출 금리가 오르는 부작용이 생긴다.

 부동자금 증가 추세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하나대투증권 양경식 투자전략부장은 “올 4분기에나 개인 부동자금이 투자처를 찾아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반기에 글로벌 경기회복세를 타고 국내 주식시장이 살아나면, 한 분기 정도 추세를 관망한 뒤 개인들이 주식시장에 들어올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손해용·홍상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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