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분석] 터키, 이라크전 협력 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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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앞으로 있을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남과 북 두 방향에서 행해질 것이다. 남쪽 공격은 쿠웨이트.바레인.카타르에서 시작된다. 현재 기지 제공을 거부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가 태도를 바꾸면 사우디아라비아도 추가된다.

이에 비해 북쪽은 터키가 유일한 통로다. 따라서 터키의 협력을 확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현재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 북부 비행금지구역에 대한 감시 활동에 사용하는 인서리크 공군기지 외에 4~5개 기지가 더 필요하다.

하지만 터키 입장에선 미국의 요구를 선뜻 수용하기 어렵다. 터키 국민의 87%가 이라크 공격을 반대한다. 같은 이슬람권이라는 명분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터키가 받을 경제적 피해가 막대하기 때문이다.

1991년 걸프전 이후 주요 무역 상대국인 이라크에 대한 유엔의 경제제재 조치로 지금까지 약 4백억달러의 피해를 보았다.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연간 1백20억달러 규모의 관광산업이 큰 손해를 보는 것을 비롯해 외국인 투자 위축, 유가 급등 등 심각한 피해가 예상된다.

정치적 피해도 고려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쿠르드족의 움직임이다. 터키는 전체 인구 6천8백만명 가운데 1천2백만명이 쿠르드족이다.

터키 남동부와 이라크.이란.시리아.카프카스 산악지대에 흩어져 사는 쿠르드족은 독립국가 건설이 오랜 꿈이다.

미국은 이라크 공격에 이라크 북부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을 동원할 계획이며, 그 대가로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할 가능성이 있다. 쿠르드족 독립국가 건설은 터키로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커다란 재앙이다.

뿐만 아니라 걸프전 때처럼 쿠르드족 난민들이 대량으로 터키로 넘어올 가능성도 있다. 이라크가 걸프전에서 패배한 기회를 노려 봉기한 쿠르드족을 이라크군이 공격하자 터키로 도망쳐온 쿠르드족 난민이 50만명에 달한다.

이 때문에 터키는 오랫동안 정치.경제적으로 고통을 받았다. 터키 정부는 이번에도 상당한 숫자의 쿠르드족 난민이 국경을 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국경 지대에 1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텐트촌 건설에 착수했다.

이처럼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터키 정부는 미국에 협력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걸프전 때 개입을 반대했던 군부도 이번엔 태도를 바꿨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다. 터키 경제는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특히 현재의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데 미국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다음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으로서 미국과 긴밀한 관계 유지, 그리고 최근 터키의 최대 외교 현안인 유럽연합(EU) 가입에도 미국의 측면 지원이 필요하다.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은 석유다. 터키는 오래 전부터 이라크 석유에 눈독을 들여 왔다. 이라크 북부 키르쿠크와 모술은 세계적 유전지대다. 키르쿠크는 확인된 매장량만 1백억배럴이 넘는다.

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때 터키는 이 지역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터키는 미국에 협력하면 전후(戰後) 미국 주도로 새로운 중동 판짜기가 행해질 때 석유 이권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아랍국가들과 쿠르드족으로부터 강한 반발에 부닥칠 것이다. 터키가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협력하는 문제는 이처럼 계산이 복잡하다. 그래서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아직 고민 중이다.

정우량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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