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는 판돈 뺏기는 게임…지켜야 할 법칙은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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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강일구

노후의 자산운용은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그래서 ‘100-나이의 법칙’으로 주식 비중을 조절해야 한다는 게 통설이다. 60세면 주식 비중은 40%를 넘지 말라는 얘기다. 나이가 들수록 투자기간이 짧아져 장기투자를 하지 못하므로 위험자산의 비중을 줄여야 한다는 경제 상식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노후자산을 안정적으로 운용해야 하는 데는 생애 남은 투자기간뿐 아니라 인적자본의 변화, 적립과 인출의 차이라는 두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첫째, 퇴직 후에는 인적자본의 가치가 줄어든다는 점이다. 인적자본이란 한 사람이 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젊을 때는 일을 해서 돈을 계속 벌 수 있다. 이렇게 벌 돈을 채권이나 주식가격을 계산할 때처럼 현재 시점에 맞게 할인하면 인적자본의 가치를 산정할 수 있다.

채권은 매번 받는 이자를 적절한 할인율로 현재의 가치를 계산한다. 주식도 배당금을 할인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매달 받는 월급의 흐름을 추정해 할인하면 그 사람의 인적자본의 크기를 산정할 수 있다. 소득 흐름이 길고 소득이 많을수록 인적자본의 가치는 커진다.

젊을 때는 돈을 벌 수 있는 기간도 많이 남아 있다. 버는 돈도 노후 때보다 많아 인적자본의 가치가 높다. 계속 직장을 다닐 가능성도 커 비교적 안정적이다. 교사나 공무원의 경우 정년까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정한 월급을 계속 받을 수 있다. 이들은 가장 안정적인 채권을 많이 보유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인적자본을 가진 사람은 상대적으로 위험한 자산 비중을 늘리는 게 좋다. 위험자산에 투자한 것이 간혹 실패하더라도 근로소득에서 돈을 벌어 기회를 다시 잡을 수 있고, 좀 더 장기로 기다려 수익을 만회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일용직이고 소득이 불규칙한 인적자본을 가진 사람은 유동성을 보유해야 한다. 위험자산에 투자했다가 실패했을 때 근로소득마저 없다면 생존에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이가 들면 일을 해서 버는 소득이 급격히 줄어들 뿐 아니라 버는 기간도 짧아진다. 따라서 이들의 인적자본 가치는 퇴직을 전후해 급격하게 주는 게 일반적이다. 안정적인 인적자본이 줄어들면 위험자산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지므로, 금융자산에서 위험자산의 비중을 줄이고 안정적인 자산을 늘려야 하는 이유다.

불규칙 소득자는 유동성 중요
둘째, 돈을 인출하는 시기는 돈을 적립하는 시기와는 달리 위험에 신중해야 한다. 돈을 적립하는 시기는 젊을 때이고 돈을 인출하는 시기는 퇴직 이후인 게 일반적이다. 노후는 저축된 자산을 운용하면서 일정한 금액을 매달 인출해야 한다. 이 두 시기는 자산운용이 달라야 한다. 포커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처음 시작할 때 판돈을 1000만원 주고 판마다 50만원씩 더해 준다고 하자. 게임 참가비는 없다. 그러면 첫 판에 전혀 베팅을 하지 않으면 두 번째 판에 판돈은 1050만원이 된다. 첫 판에 100만원을 잃었다면 900만원에서 50만원이 더해진다. 두 번째 판의 판돈은 950만원으로 줄지만 한 판만 더 기다리면 다시 50만원이 채워져 1000만원이 된다.

이와는 달리 판돈을 1000만원 주고 시작하면서 판마다 판돈을 50만원씩 빼앗아가는 게임을 생각해보자. 이 경우 첫 판에 베팅을 하지 않으면 두 번째 판돈은 950만원이 된다. 첫 판에 100만원을 잃었다면 900만원이 되는데 여기서 50만원까지 빼앗겨 두 번째 판의 판돈은 850만원이 된다. 다시 베팅을 하지 않고 한 판 더 기다리면 50만원이 감소, 판돈은 800만원이 된다.

똑같이 1000만원으로 시작해 첫 판에 져서 100만원을 잃고 두 번째 판은 베팅을 하지 않았는데, 전자는 남은 돈이 1000만원, 후자는 800만원으로 200만원이나 차이가 나게 된다. 세 번째 판에서 전자는 1000만원 판돈으로 게임을 하고 후자는 800만원이 남을 뿐이다.

안정적이라도 인플레이션 상계 가능
이 두 경우에서 보다 과감하게 위험을 감수하면서 베팅을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쪽일까? 당연히 전자다. 베팅에 실패했더라도 다시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다. 후자의 경우는 처음 판부터 베팅에 성공해 계속 돈을 많이 벌면 좋지만 처음부터 돈을 잃게 된다면 판돈이 급속히 줄어든다. 이후에 돈을 따더라도 처음 상태로 회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처럼 적립시기(젊을 때)는 위험한 투자자산에 투자해도 된다. 투자가 실패했더라도 다시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위험 감수에 대한 벌칙이 그다지 크지 않다. 반면에 노후의 인출 시기는 판돈이 계속 줄어드는 것이므로 투자를 잘못한 데 대한 벌칙이 너무 크다. 따라서 인출 시기에는 안정적인 운용이 투자의 1순위다.

결국 노후에 자산을 안정적으로 운용해야 하는 것은 투자기간이 짧아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적자본의 가치가 감소하고 또 인출 시기라는 특징이 있어서다. 노후는 자산운용을 좌우하는 근간이 젊을 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보다 세밀해야 하고 투자에 실패할 확률을 줄여야 한다.

하지만 안정적으로 자산을 관리하라는 것이 인플레이션도 감내하지 못할 정도로 운용하라는 뜻은 아니다. 수명이 길어진 만큼 위험은 조금 취해도 된다. 연금소득과 같이 확정적인 현금흐름을 주는 자산이 어느 정도 있다면 나머지 자산까지 너무 안정적으로 투자할 필요는 없다. 다만 변동성이 큰 위험자산은 피해야 한다. 이런 걸 감안하면 노후에는 최소한 인플레이션은 감당할 수 있으면서 투자 실패에 대한 벌칙이 크지 않은 중수익·중위험을 가진 투자가 좋다.

구체적으로는 연 5~7% 정도의 수익률을 추구하는 금융상품을 중수익 상품으로 분류할 수 있다. 최근에는 시장의 움직임에 좌우되지 않고 절대 수익을 추구하는 상품들도 꽤 나와 있다. 해외 채권형 펀드나 안정형 변액연금 등이 대표적이다.

김경록 미래에셋 은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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