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미디어 바이러스' 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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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바이러스/더글러스 러시코프 지음, 방재희 옮김/민음사, 1만5천원
부시의 언어장애/마크 크리스핀 밀러 지음, 김태항 옮김/한국방송출판, 1만2천5백원

오늘날 미디어는 분산되고 있다. 좋게 말해 민주화됐고 중심을 상실했다. 책.신문.TV 같은 전통적인 미디어에 홈비디오.인터넷.휴대전화 등이 덧붙어 다매체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개인이 미디어의 수요자이자 공급자가 된 시대. 그래서 '중심'의 힘은 허약해졌다. 우리는 지난 대선에서 '미디어 혁명'의 극적인 장면 중 하나를 목도했다.

투표일 전날 밤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의 지지를 철회했을 때, 노무현 지지자들은 그 의미와 대응 방식을 인터넷에 올리며 불과 몇 시간새 입장을 정리하고 상황을 장악했다. 다음날 아침 조간신문들이 배달됐을 때는 '게임은 끝'이 나 있었다.

최근 논란이 된 세대 간 갈등도 결국 뉴미디어를 어떻게 수용하느냐는 차원으로 수렴된다. '미디어 바이러스'(원제 Media Virus)는 뉴미디어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한 세대가 어떻게 기존의 주류 미디어가 틀어쥔 권력을 위협하고 잠식하는지를 논증한다.

1994년에 출간됐지만 지금의 우리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러시코프는 97년에 나온'카오스의 아이들'(민음사)로 국내 독자에게 이미 낯익은 인물이다.

61년생으로 TV세대에 속하는 그는 '카오스의 아이들'에서처럼 이번에도 뉴미디어 세대를 적극 옹호한다. '90년대의 마셜 매클루한'이라는 별칭에 어울리게 그는 미디어에 관한 한 '낙천적인 예언자'다.

매클루한은 바퀴가 인간의 발을, 망치가 인간의 손을 연장시켰듯 전화와 라디오.TV 등은 인간의 감각을 확장해 마침내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묶는다고 주장했다.

러시코프는 이 관점을 이어 받아 네트워크로 대표되는 뉴미디어도 개인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한편 '대중의 무기'가 된다고 역설한다.여기서 '대중의 무기'란 기존의 주류 미디어가 가진 일방성에 딴죽 걸기를 말한다.

저자는 92년의 '로드니 킹'사건을 예로 든다. 한 흑인이 LA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장면이 시민의 캠코더에 잡혀 몇 시간 후엔 인터넷을 달구고 TV에 방영되면서 사회 문제로 번졌던 것이다. 홈 비디오와 인터넷이라는 '신무기'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또 뉴미디어 세대는 기존 미디어를 기피하지 않고 영리하게 이용한다. 이들이 만드는 TV 어린이 프로그램인 '피위의 플레이하우스''렌과 스팀피 쇼' 등에는 동성애자의 생활 양식이 등장한다.

시청자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으면서 자기세대의 세계관을 유포하는 것이다. 이같은 은밀한 방식을 러시코프는 '미디어 바이러스'라고 부른다.

바이러스처럼 기성 미디어에 착 달라붙어 무력하게 만든 뒤 대안적이고 저항적인 세계관을 퍼뜨린다는 말이다. 뉴미디어 세대에게 TV는 더 이상 '바보 상자'가 아니다.

그러나 뉴미디어가 과연 장밋빛이기만 할까. '부시의 언어장애'(원제 The Bush Dyslexicon)는 '미디어 바이러스'를 읽은 뒤 드는 일말의 의문에 대한 반증이다.

뉴욕대 교수인 저자는 조지 W 부시가 미국 역사상 가장 '우둔한' 대통령이라고 단언한다. 단수 동사와 복수 동사를 구별하지도 못할 정도라는 것. 문제는 부시가 자신의 무지에 무신경하다는 점이다. 부시가 이처럼 태연한 건 TV를 장악한 미국 제도권이 그를 지원하기 때문이다.

미국 TV들은 부시의 불명확한 발음을 꾸밈없는 성격으로, 그의 무지를 힘으로 선전했다. 9.11 이후에는 부시의 엉성한 위기 대처능력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재앙을 빌미로 그를 영웅화했다.

주류 미디어, 특히 TV가 자의적으로 부시를 이미지 조작하는 데도 뉴미디어는 눈에 띄는 '딴죽 걸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저자는 이 같은 '미디어 조종'이 먹혀드는 데는 미국인들, 특히 뉴미디어 세대의 전반적인 지적 능력 하락도 큰 몫을 한다고 덧붙인다.

어느 책의 진단이 설득력이 있을까. 아직은 정답이 없다. '미디어 바이러스'가 뉴미디어의 긍정적 기능에만 과도하게 주목한다면 '부시의 언어장애'는 기존의 주류 미디어가 세운 굳건한 성채를 뉴미디어가 격파하기는 아직 역부족임을 보여준다. 뉴미디어와 올드미디어는 여전히 투쟁 중이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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