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해지는 연비·안전 규정이 앞모습 바꾼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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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호 23면

네 개로 나뉜 헤드램프를 두 개로 합친 벤츠 신형 E클래스. 유럽을 시작으로 새로 생긴 안전 규정을 만족하기 위해 헤드 램프 디자인을 바꿨다. [AP=연합뉴스]

지난 1월 14일부터 열린 북미국제오토쇼(NAIAS:디트로이트 오토쇼)에 처음 등장한 메르세데스-벤츠(이하 벤츠) 신형 E클래스는 사뭇 달라진 얼굴이 관심을 모았다. 1995년부터 벤츠가 고집했던 4등식 헤드램프(양쪽에 라이트가 2개씩 달린 헤드램프)를 버리고 보통 차들과 다름없는 2등식 헤드램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 벤츠 관계자는 “벤츠의 헤리티지를 추구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95년부터 자랑했던 분리형 헤드램프는 벤츠의 헤리티지를 추구하지 않았던 걸까?

디트로이트 오토쇼 디자인 품평

벤츠에서 일하는 한국인 디자이너 이일환(40)씨에게서 색다른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유럽을 중심으로 새로 시행되는 규정 때문에 헤드램프를 새로 디자인했다”는 내용이었다. 안전을 위해 새로 만들어진 이 규정은 전면을 보다 광범위하게 비추는 램프를 권장하고 있다. 벤츠에서는 이 규정을 만족하기 위해 분리형 램프를 하나로 합치면서 측면까지 넓게 비추는 램프를 집어넣었다. 4개로 나뉜 기존 램프는 너무 좁아 측면을 넓게 비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형 E클래스는 4개로 나뉘었던 헤드램프를 2개로 합치는 대신 LED 타입 면발광 램프로 각각의 등을 감싸 기존 E클래스의 분리형 헤드램프 분위기를 이어 갔다.

오토쇼 현장에서 만난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각 지역에서 권장하는 규정을 따르다 보면 많은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며 “만일 이런 규정이 추가되지 않았다면 더 멋진 차들이 나왔을 것”이라고 말한다. 비행기처럼 날렵한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싶지만 날로 강화되는 안전규정이 덜미를 잡는다는 얘기다. 지금의 안전규정은 편평한 전면부와 두툼한 보닛을 원한다. 보행자 안전을 이유로 전면에 뭔가가 돌출된 게 있으면 안 된다. 돌출된 범퍼 역시 보행자와 충돌 시 골절 우려가 있어 허용되지 않는다. 80년대 국내 승용차에서 유행한 툭 튀어나온 범퍼는 더 이상 디자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보닛은 엔진과 5㎝ 이상 떨어져야 한다. 보행자 충돌사고 때 보닛 위로 떨어질 수 있는 보행자의 머리를 보호해야 한다.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이런 규정들을 모두 만족시키다 보면 앞모습이 모두 엇비슷하게 될 수밖에 없다”며 “세부적인 규정까지 추가돼 디자이너의 자유는 점점 줄어드는 게 현실”이라고 말한다.

1 닛산 레조넌스 컨셉트. 두툼한 전면에 넓은 그릴이 들어갔다. 2 쉐보레 신형 콜벳. 연비를 위해 그릴 일부가 막혀 있다. 3 캐딜락 ELR. 대형 그릴은 막혀 있다. 전기자동차이기 때문. 4 현대 HCD-14. 전면을 LED로 화려하게 꾸몄다. 장진택 기자

LED 덕분에 디자인할 맛 난다
디자이너의 자유가 줄어든다는 것은 곧 디자인의 획일화를 뜻한다. 아우디를 닮은 라디에이터 그릴, BMW를 닮은 헤드램프처럼 신차라고 하기에는 묘하게 닮은꼴이 쏟아져 나온다. 다 강화된 규정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연비를 중시하는 친환경 규제도 디자이너를 옥죈다. 대부분의 차가 연비를 위해 비슷한 에어로 다이내믹(공기역학)을 접목하다 보니 디자이너들도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된다. 오터쇼 무대 위에 날렵하게 깎인 대형 그릴, 쫙 찢어진 헤드램프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공기역학 때문이다.

디자이너들은 이런 획일화 속에서 LED의 역할이 매우 크다고 입을 모은다. 둥근 전구는 둥근 반사판을 뒤에 넣어 둥글게 디자인해야 했지만 LED는 반사판도 필요 없고 둥글게 디자인할 필요도 없다. 줄지어 배치하거나 불투명 플라스틱을 더해 더욱 다양한 형태로 발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북미국제오토쇼에 등장한 최신형 차의 눈매는 모두 LED로 꾸며져 있었다. 무대 중심에 놓인 컨셉트카들은 대부분 헤드램프까지 LED로 무장했다. BMW 4시리즈 컨셉트카를 디자인한 한국인 강원규(38) 디자이너는 “LED는 자유롭고 확실한 빛으로 독특한 인상을 만들어 준다. 4시리즈 헤드램프를 돌아나가는 빛 역시 LED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미국제오토쇼에 등장한 컨셉트카들은 화려한 헤드램프 사이로 커다란 그릴을 품고 있었다. 현대 제네시스의 미래를 보여 주는 HCD-14 컨셉트카를 비롯, 대다수의 컨셉트카가 커다란 그릴로 전면을 감쌌다. 통상적으로 커다란 그릴은 대용량 엔진을 뜻한다. 커다란 엔진을 식히기 위한 커다란 라디에이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요즈음 고성능 차들은 엔진을 식히는 라디에이터 외에 엔진오일을 식히는 장치, 엔진으로 들어가는 공기를 식히는 인터쿨러 장치, 바퀴 안쪽을 식히는 공기 구멍 등이 추가되면서 곳곳에 공기 구멍을 마련하고 있다. 범퍼 밑에 달린 공기 구멍, 보닛 위나 측면에 뚫린 공기 구멍이 모두 그런 역할을 한다.

하지만 모든 구멍이 실제로 뚫려 있는 건 아니다. 고성능 분위기를 위해 ‘가짜로’ 만들어진 공기 구멍이 꽤 된다. 특히 전기자동차는 엔진을 식히는 라디에이터 자체가 없지만 고성능 차 못지않은 대형 라디에이터 그릴을 전면에 배치한다. 캐딜락 ELR은 전기모터로 움직이는 전기자동차이지만 캐딜락만의 커다란 라디에이터 그릴이 전면에 나와 있다. 이 그릴은 무늬만 대형 그릴일 뿐 실제로는 막혀 있다.

디자이너들은 대형 그릴에 대해서도 좌절하는 한마디를 쏟아낸다.

“안전규정 때문에 전면부를 두툼하게 할 수밖에 없다. 이곳을 강렬하게 디자인하기 위해 대형 그릴이 가장 적절하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디자인은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말이다.

"형태는 안전을 따른다"
1896년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고 말했다. 90년이 지난 1982년, 제품 디자이너 헬무트 에스링커는 “형태는 감정을 따른다(Form follows emotion)”고 말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디트로이트 오토쇼를 찾은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형태는 안전을 따른다(Form follows safety)”라고 강조한다. 보행자 안전을 위해 여러 규정이 추가되고 있고 이 때문에 자동차 디자인이 속속 바뀌고 있다는 얘기다.

앞으로 규정이 더 강화되면 오토쇼도 의미가 퇴색할 수 있다. 각기 다른 신차를 뽐내던 쇼에서 연비·안전규정을 누가 더 잘 따랐느냐를 평가하는 따분한 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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